최근 대전 IBS 본원에서 동아사이언스와 만난 노도영 IBS 원장. IBS 제공
"대학, 출연연, 연구기관 등 양자를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기초과학연구원(IBS)으로 몰려들었으면 좋겠어요. 자유롭게 IBS에서 함께 포럼을 열고 규모가 큰 실험을 진행하면 어떨까요. IBS가 양자기초연구의 허브가 되는 것, 바로 '양자연구클러스터(가칭)'를 구축하려는 이유입니다."
지난해 11월 5년 임기를 마친 노도영 IBS 원장을 최근 대전 IBS 본원에서 만났다. 그는 "IBS를 한국 양자기초연구의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씨를 뿌리고 가겠다"며 양자연구클러스터 설립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곧 차기 원장에게 자리를 넘겨줘야 하는 노 원장이 마지막 목표를 세운 셈이다. 그는 아직 후임 원장이 정해지지 않아 원장직을 수행 중이다.
양자연구는 IBS에게 숙원사업 같은 분야다. 노 원장은 "IBS는 국내에서 양자가 크게 주목받지 않았던 2017년부터 양자 연구단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며 "양자는 기초과학에 기반하고 있으면서도 멀지 않은 미래에 산업까지 큰 파급을 가져올 수 있는 분야라 국가 기초과학 시스템을 구축하는 IBS가 양자연구 허브 역할을 맡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현재 IBS에는 양자물질, 양자물성 연구에 집중하는 4개의 양자 관련 연구단이 있다. 노 원장은 '양자정보'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단들을 추가한 다음 모든 양자 연구단을 통합해 양자연구클러스터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양자통신, 양자센싱, 양자컴퓨터 등에 쓰이는 양자정보는 양자원리를 이용해 정보를 처리하는 분야다. 연구단들은 클러스터 안에서 교류하고 협력하며 양자원천기술을 확보한다.
양자연구를 기업이 아닌 기초과학 연구기관에서 주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노 원장은 "혁신적인 응용은 기초과학 연구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출연연, 기업 등에서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한 연구를 충분히 하고 있다"며 "그러나 기초과학마저 기술 개발만을 목표로 두면 성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기초과학이 혁신적인 성과를 가져온 대표적인 사례는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 트랜지스터, 상대성이론에 기반한 내비게이션이다. 이들 사례는 처음부터 '응용화', '기술화'가 아닌 연구 자체가 목표였던 기초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노 원장은 "초기 연구목표는 상용화가 아니지만 연구 과정에서 성과에 대한 응용성이 보이면 적극적으로 기술사업화를 진행한다는 것이 IBS의 방침"이라고 했다.
IBS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던 2020년 김빛내리 IBS RNA연구단장(서울대 교수)이 질병관리청과 코로나19의 원인으로 지목된 사스코로나바이러스2(SARS-CoV2)의 유전물질(RNA) 전사체를 세계 처음으로 분석한 것이다. 연구결과는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공헌해 큰 주목을 받았다. 노 원장은 "평소 세균과 바이러스에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 탐구했던 기초과학 연구가 있었기에 필요한 시기에 중요한 연구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 원장은 IBS가 국내 크고 작은 양자연구를 지원하는 든든한 허브가 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는 "IBS의 설립 목표는 큰 규모의 집단 연구를 지원하고 보강하는 것"이라며 "IBS에서 다양한 양자연구가 진행되도록 장소, 대학에서 갖출 수 없는 대규모 장비와 시설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양자연구클러스터가 구축되면 8월 준공되는 IBS 본원 2차 건물에 들어온다. 지하1층 지상5~8층, 2개동 규모인 IBS 본원 2차 건물은 연면적이 3만 8853㎡다. 연구 지원을 위한 '총알'이 든든한 셈이다.
2011년 설립된 IBS는 연구자들의 '꿈의 기관'이다. 연구단을 대표하는 단장을 중심으로 연구단을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최소 10년간 연구 기간도 보장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그만큼 평가가 까다로워서 8년차 성과평가 이후 연속으로 A등급 이하를 받은 연구단은 종료 혹은 규모 조정 등의 과감한 조치가 취해진다. 단장이 정년 등의 이유로 퇴임하면 연구단이 사라진다. 연구단이 사라지며 연구단에 투자한 대규모 설비, 인력 등이 증발한다는 지적을 받아온 이유다.
노 원장은 이 같은 문제를 연구클러스터 체제로 잘 대응해왔다는 입장이다. 계획 중인 양자연구클러스터가 그 예다. 노 원장은 "여러 연구단을 연구클러스터에 속하게 함으로써 연구 시너지를 낼 뿐 아니라 하나의 연구단이 사라져도 연구단의 산유물을 클러스터 안에서 공유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현재 IBS에는 입자 및 핵 물리 연구클러스터, 응집물질과학 연구클러스터 등 6개 연구클러스터가 있다.
IBS는 국내외 유수의 젊은 연구자들을 공격적으로 영입하기 위해 '주니어 CI'를 올해 처음 뽑는 시도를 한다. 주니어 그룹장(CI)은 소규모 연구그룹을 구성해 기초과학 분야의 모험적·창의적 연구를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이다. 노 원장은 "IBS 연구단보다 규모가 작은 연구그룹보다 더 작은 연구를 IBS에서 자유롭게 수행하고 싶다는 요구가 국내외에서 많아 주니어 CI 제도를 도입했다"면서 "IBS는 선진국식 연구 환경 덕에 외국인 연구자 비중도 30%에 달한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노 원장은 차기 원장이 다양한 도전적인 과제를 수행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노 원장은 "원장으로 부임한 1, 2년차는 설립 10년차에 접어든 IBS를 향해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던 시기라 IBS가 설립 목표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며 "지금은 일본 이화학연구소(리켄), 독일 막스플랑크와 협력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IBS가 성장했기 때문에 IBS가 더욱 도약하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노도영 IBS 원장. IBS 제공
다음은 노 원장과의 일문일답.
Q. 양자 외 IBS가 주목해야 하는 큰 기초과학 주제가 있나.
"양자를 비롯해 뇌공학, 감염병, 기후, 우주라고 생각한다. 모두 기초과학을 강력히 기반으로 두면서도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분야다. IBS가 국내 기초과학의 거점으로서 이들 분야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IBS에 정부 투자가 더 늘어야 한다고 보는지.
"개별 연구단이 갖는 예산이 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IBS 전체 예산은 줄지 않았지만 연구단이 받는 예산이 줄고 있다. 2022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2차 기본계획'을 추진하며 IBS에 2030년까지 50개의 연구단을 구축해 한국을 세계 10위권 연구경쟁력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원장으로 취임할 당시 연구단 수와 현재 연구단 수는 30개로 비슷하다. 장기적인 기초연구의 중요성에 공감하는 방향으로 예산이 지속되길 바란다."
Q. 임기 중 가장 뿌듯했던 성과 중 하나는 무엇인가.
"2022년 강원도 정선 지하 1000m에 지하연구시설 '예미랩'을 완공한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곳에서 중성미자와 암흑물질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자들이 해외에 가지 않아도 국내에서 우주에 관한 기초과학 연구와 실험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예미랩은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철강, 건설 등 회사와 협력함으로써 새로운 분야의 기업 생태계를 만들었다. 삼성전자가 예미랩에서 불순물을 줄인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실험도 진행 중이다. 기초과학이 생각지 못했던 응용 분야를 개척했다."
Q.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남은 임기 동안 차기 원장 임기에 양자연구클러스터가 구축되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 예미랩을 비롯해 내 임기 동안 얻은 성과는 전임 원장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퇴임 후에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 분야와 관련된 과학 이슈에 커다란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
[이채린 기자 rini11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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