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지혜원 감독, 2025) 목소리들>
[윤일희 기자]
'제주 4.3'의 밤, 영화 <목소리들>을 보았다. 영화 속 한 피해자 여성이 내쉬던 통곡 같던 한숨이 계속 따라다니는 듯해 며칠 동안 답답했다. 나는 저런 깊은 한숨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다. 남편의 살해 협박을 피해 도망 나온 친구가 내쉬던 비명 같던 한숨 소리. 말하고 싶은데, 말해야 하는데, 만들어지지 않던 말 대신 대신 터져 나오던 한숨 소리.
1948년 봄, 제주 한 마을의 젊은 여자들이 끌려가 며칠 후 모두 사살되었다. 기적처럼 단 한 소녀가 살아 돌아왔다. 하지만 그 소녀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평생 그 사건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왜 평생 한마디도 할 수 없었을까.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오랜 세월 침묵하게 만들었을까.
<할망은 희망>을 쓴 제주 지역 연구자 정신지도 '제주 4.3' 여성 피해자의 이러한 '말할 수 없음'의 공통된 현상을 수없이 목격했다. 그들이 당한 피해는 "나와서는 안 될 것, 나오지 않는 편이 나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사회적 약자에게서 나타나는 이러한 강요된 침묵을 그는 가부장제와 국가권력의 규범이 만든 억압으로 보았다.
묵인으로 승인된 제도적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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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목소리들> 스틸 이미지. |
ⓒ (주)스토리온 |
영화는 한 증언자의 입을 통해 당시 마을에서 한꺼번에 끌려가 처형당한 젊은 처녀들의 피해를 복기한다. 봄 달이 밝던 그날 밤, '달빛에 비쳐 예쁘장한 여자만 골라 데려갔다... 서북청년단(이하 서청)이 가장 그리운 게 여자라고 했다... 배고픈 미친개를 야산에 풀어놓은 격이었다.'
이 증언은 당시 여성들이 당한 피해가 강간과 살해였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이러한 폭력이 서청이라는 일단의 남자들의 야수적 본능이 일으킨 사건이라고 말한다. 이 증언은 여성들이 그 밤에 당한 폭력을 설명하는 데 충분할까. 당시 흉흉히 떠돌던 말을 경유해 나온 증언은 '4.3'의 전시 성폭력과 여성 살해를 오해하게 만든다.
그 밤 강간과 살해를 저지른 서청의 극악무도한 폭력은 여자가 그리워서가 아니다. 그래도 되었기 때문이고, 이는 묵인으로 승인된 제도적 폭력이었다. 점령지의 여자를 강간함으로써 점령지 남자를 전투적 심리적으로 제압하려는 야만적 전쟁 전술은 유구한 세월 무고한 여자들을 제물 삼았다. 여성의 몸은 전장터였다. 언제든 침범되고 속박될 수 있었다.
강간당한 여자는 절대 그 피해를 발설하지 못할 것이고, 여자에게만 순결을 강요하는 남성중심적 성규범 또한 성폭력을 은폐할 것이 명백했기에, 승인된 전시 성폭력은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그 밤 젊은 처녀들은 서청에 의해 한번 죽고, 살아 돌아왔더라도 강간당한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면하지 못함으로써 두 번 죽었을 것이다. 두 번 죽지 않기 위해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침묵이라면, 과거도 지금도 그 책임은 우리 사회에 있다.
"남자들 보면 너무 무서워"라는 말뿐, 어떤 피해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말하지 못하는 피해자의 심정은 그저 깊은 한숨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피해를 말할 수 없는 제주의 피해자와 달리 서로의 피해를 살피고 나누었던 다른 나라의 여자들을 생각해 본다. 이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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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목소리들> 스틸 이미지. |
ⓒ (주)스토리온 |
<함락된 도시의 여자>는 2차대전에서 패한 독일에 러시아 붉은 군대가 들어와 독일 여성들을 무자비하게 강간했던 사건들을 다룬다. 마치 당연한 권리인 듯 승전국의 군대는 패전국의 여자들을 강간했다. 추산된 강간 피해는 50-100만이었다. 여기서 추산이나마 피해자 숫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4.3'과 현격한 대비를 이룬다.
당시 독일의 강간 피해자들을 '잘못된 피해자'라고 부른 민심은 분명 피해자들에 대한 상당한 혐오를 반영하지만, 아예 피해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여긴 제주의 상황과는 다르다. 책에서 성폭행당한 여자들을 위한 진찰실이 열렸다는 사실은 부족하게나마 여성들의 피해를 인지하고 대처하고 있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4.3'의 전시 성폭력 피해는 적국의 군대에 의해 일어난 전시 성폭력과 다르다고 할지 모르겠다. 이는 여성의 강간 피해가 누구에게 당했느냐에 따라 피해의 경중이 달라진다고 믿는 사람들의 기준일 뿐이다. 누구에게 당했던 강간은 강간이고 피해는 피해이다. 피해를 말할 수 있었던 여자들과 피해에 대해 입도 뗄 수 없는 여자들의 삶은 이후 견뎌야 할 무게가 달랐다.
"우리는 성폭력을 집단 경험으로 여긴다. 집단적 강간 경험은 집단적으로 회복되는 중이다. 여자들은 강간 경험과 괴로움을 말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그것을 말할 수 있게 하고,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토로하며 서로를 지지한다... 그렇다고 남는 생애 동안 고통받지 않는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러한 피해자 공동의 말하기와 지지하기 경험은 지난해 10월 국회에서 있었던 '44년 만의 미투'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용기와 증언>을 통해 드러났다. 44년이 지났건만 "얼룩무늬 군인 옷만 보면" 그때의 참혹함과 공포로 돌아가고 마는 피해자들의 고통은 '5.18' 진상 규명에서 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는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 응답을 통해 이루어지는 부정의의 교정과 피해의 회복이 증거되어야만 70년이 넘도록 어떤 말도 발설할 수 없는 저 깊은 한숨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4.3' 생존자 여성들에게 보내는 지지와 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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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목소리들> 스틸 이미지. |
ⓒ (주)스토리온 |
국회 증언대회에 앞서 4월 공개된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등에 의한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보고서는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해 앞으로 해야 할 바와 동시에 그동안 "축소 부인 은폐"된 진실의 경위와 발굴이 시급함을 알려준다. 이 보고서에 앞서 이미 '5.18' 당시 성폭력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차례 드러났었다. 단지 그들의 목소리를 부차적인 피해라고 경시하고 모욕하지 않는 제대로 된 청자가 없었을 뿐이다. '4.3'의 성폭력 피해 또한 그저 공동체 모두가 몰라서 드러나지 않은 것인가.
'5.18' 성폭력 피해자 김선옥씨는 공개 증언을 한 뒤 "나는 맨몸으로 던져진 느낌, 모든 사람이 '저 여자 성폭행당했대' 이런 얘길 하는 것 같은 트라우마를 겪었다." 용기를 내 증언을 한 여성이 겪어야 했던 대가가 이것이었다. 이것이 여성들이 44년을, 70년을 발설하지 못한 이유다. 성폭력을 겪은 후 그들이 마주했던 세상의 부정의를 빼고, 여성들이 침묵하는 원인을 단지 그날의 공포에서만 찾는다면, 그래서 그런 가공할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만을 악마화한다면, 우리 사회는 다시는 전시 성폭력이 없는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성폭력 피해자가 목소리를 낼 때, 이를 기꺼이 들으려 노력하는 청자가 없다면, 피해자의 용기와 증언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정의로운 청자의 등장과 이들로부터 전시 성폭력 피해의 회복과 재발 방지의 요구가 강력한 '목소리들'로 터져 나올 때, 성폭력이 더 이상 피하고 숨길 피해로 남지 않을 때, 성폭력 재발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과 한숨과 눈물로 '목소리들'을 대신한 '4.3' 생존자 여성분들께 깊은 지지와 존경을 보냅니다. 더불어 '4.3' 희생자분들께 뒤늦은 추모의 마음을 보냅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게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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