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필의 미래창
1930년대 테크노크라시 운동 주도
효율성 중심의 기술지배사회 추구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어 실패
머스크 정부효율부 행보와 빼닮아
일론 머스크(왼쪽)가 맡고 있는 미국 정부효율부가 공무원 대량 감원을 추진하고 있는 데는 그의 외조부인 조슈아 홀드먼(오른쪽)의 테크노크라시 사상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사스캐처원주기록보관소, 위키미디어 코먼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정부효율부(DOGE) 수장으로 임명된 이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연방정부 기구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 움직임 뒤에는 1930년대의 실패한 ‘테크노크라시 운동’(Technocracy Movement)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머스크는 지난 두달 사이에 대외원조 기관 미국국제개발처(USAID)를 사실상 폐쇄하는가 하면 국세청, 보훈부, 소셜시큐리티청, 에너지부, 교육부 등 각 부처 공무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해고를 지휘했다. 정부효율부는 누리집을 통해 구조조정으로 벌써 1000억달러가 넘는 예산을 절약했다고 홍보한다.
그가 내세운 명분은 관료주의를 타파하고 슬림하고 스마트한 정부를 만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효율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얘기다. 하지만 그의 급진적이고 돌출적인 행동과 조처는 혼란과 반발을 야기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 이후 최고의 혁신 기업가로 평가받았던 그의 이런 정치적 행태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질 레포레 하버드대 교수(역사학)는 그의 최근 행보는 1930년대 북미에서 유행했던 ‘테크노크라시 운동’과 맞닿아 있다고 진단했다.
일론 머스크가 지난 2월 열린 한 보수 정치 집단 행사에서 전기톱을 휘두르며 효율성, 대량 해고, 세금 감면을 상징하는 몸짓을 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자칭 미래주의자를 사로잡은 ‘실패한 사상’
레포레 교수는 최근 ‘일론 머스크를 움직이는 실패한 사상’이란 제목의 뉴욕타임스 칼럼을 통해 머스크는 오랫동안 자신을 미래주의자(futurist)로 세상에 소개해왔지만, 실제로는 그의 외조부가 심취했던 100년 전 테크노크라시 운동에 사로잡혀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미네소타 출신인 그의 외조부 조슈아 홀드먼(Joshua Haldeman, 1912~1974)은 대공황 시절 농장을 잃은 후 1930년대 캐나다에서 이 운동을 이끄는 지도자가 됐다.
테크노크라시 운동이란 당시 미국과 캐나다에서 유행했던 극단주의자들의 사회운동으로, 기존의 비효율적인 선출직 정치인과 공무원을 소수의 과학자와 기술자로 대체한 기술국가(Technate)를 만들자는 움직임이다. 기술국가에선 소수의 과학기술 엘리트들이 효율성을 최우선 기준으로 객관적 데이터와 분석에 근거해 국가를 운영한다. 한마디로 기술 엘리트가 이끄는 반민주적 이상사회 건설 운동이다. 대공황을 계기로 커진 기존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불신, 20세기 초반 이후 급속히 발전한 과학과 기술에 대한 신뢰가 어우러지면서 형성된 흐름이다.
모든 것이 프로그램에 따라 운영되는 기술국가에선 다수결 투표로 결정하는 민주주의가 필요 없다. 사람은 더 이상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린다. 예컨대 당시 홀드먼의 번호는 ‘10450-1’이었다. 머스크의 아이 중에도 ‘X Æ A-12’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있다. 민주국가에선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전제로 투표를 통해 선출한 공무원들이 나라를 운영하지만, 학식을 갖춘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모든 걸 책임지는 기술국가에선 기존 정부 기관은 불필요하다.
테크노크라시 추종자들은 회색 유니폼을 입고 서로 경례하며 기존 정치 시스템의 근절을 주장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반공주의에 나치와 인종차별 지지
홀드먼은 1940년대엔 반공주의자이자 나치 지지자로 활동했다. 이어 195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로 이주해선 인종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하고, 숱한 음모론을 주장하는 책자를 여럿 집필했다. 외손자 머스크는 1971년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레포레 교수는 “머스크가 정부효율부에서 시도한 많은 일은 테크노크라시 교본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머스크가 궁극적으로 구축하려는 100만명 규모의 화성 도시도 기술국가를 지향한다. 그는 2019년 트윗을 통해 역대 최강 로켓 스타십을 개발하는 이유는 ‘화성 테크노크라시’를 건설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레포레는 머스크가 외조부와 똑같은 신념을 갖게 된 것은 그 자신의 정치적 상상력 부족과 테크노크라시의 질긴 생명력, 실리콘밸리 기업가의 오만함이 합쳐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고향인 남아공 프리토리아를 떠난 그가 1989년 외조부가 테크노크라시 운동을 펼쳤던 캐나다 사스캐처원에 정착한 것은 그의 내면에 외조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시사한다. 그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개인 비행기로 세계 각지를 탐험한 외조부의 모험심, 자립정신 등이 자신에게 영감을 줬다고 말한 바 있다.
머스크는 테크노크라시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엑스’(X)라는 알파벳이 갖고 있는 상징적 이미지에 담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스페이스엑스의 팰컨9 로켓 회수에 쓰이는 해상 바지선에 새겨진 엑스 디자인. 위키미디어 코먼스
머스크는 왜 ‘X’를 즐겨 쓸까?
머스크는 테크노크라시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엑스’(X)라는 알파벳이 갖고 있는 상징적 이미지에 담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엑스엔 부정, 제거, 모든 걸 대표하는 미지의 수, 표적, 강렬함 등 다양한 이미지가 겹쳐져 있다.
그가 1995년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기술 창업에 뛰어든 뒤 1999년 설립한 회사 이름이 엑스닷컴(X.com)이었다. 그가 온라인 결제 서비스 회사인 엑스닷컴을 설립한 이유는 전통적인 은행업을 혁신하는 것이었다. 그의 외조부를 포함한 테크노크라시 운동가들 역시 ‘도둑놈과도 같은’ 은행이 없는 사회를 지향했다. 엑스닷컴은 나중에 페이팔과 합병하면서 사라졌으나, 머스크는 2017년 엑스닷컴 도메인(URL)을 다시 사들였다. 우주발사체 기업 스페이스엑스(SpaceX), 테슬라의 전기차 모델 엑스(Tesla Model X), 인공지능 개발 기업 엑스에이아이(xAI), 소셜미디어 엑스(X) 등에서도 엑스에 대한 그의 집착을 엿볼 수 있다.
2022년 트위터 인수 후 이름을 엑스로 바꾼 그는 인수 목적 가운데 하나로 ‘깨어 있는 정신 바이러스’(woke mind virus) 퇴치를 꼽았다. 그의 생각에 트위터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 보호 같은 정치적 이념(깨어 있는 정신)에 오염돼 있었다. 트위터를 공통의 디지털 광장으로 바꾼다는 게 그가 내세운 명분이었다. 레포레 교수는 “그의 이런 인식은 외조부가 갖고 있던 ‘대중 의식 조작’(mass mind conditioning) 개념의 복사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를 부도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론매체와 대학 교수들에 의한 집중적인 대중의식조작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정부효율부 수장을 맡은 일론 머스크의 폭주에 대한 반발과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앞쪽의 아기는 ‘X Æ A-12’라는 이름을 가진 머스크의 아들. 2025월 2월 백악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머스크는 떠나도 머스크주의는 남을 것”
레포레 교수는 이와 함께 20세기 초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등장한 해묵은 ‘미래주의’(futurism)도 오늘날 실리콘밸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미래주의는 당시 기술과 속도, 에너지, 젊음 등을 가치로 내세우며 폭력과 남성성을 찬양하고 자유와 민주를 반대했다. 미래주의 창시자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는 ‘미래주의 선언’ 발표 10년 후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선언을 공동집필했다. 레포레 교수는 머스크의 조력자로 그의 정부효율부 일을 돕고 있는 벤처캐피탈리스트 마크 앤드레슨이 2023년 ‘기술낙관주의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자신에게 영감을 준 사람으로 마리네티를 꼽았다고 말했다.
그는 “머스크주의는 미래의 시작이 아니라 100년도 더 전에 시작된 자본과 노동, 독재정치와 민주주의의 갈등 이야기의 종착점”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그런 사상투쟁은 테크노크라시뿐 아니라 루즈벨트의 뉴딜정책과 오늘날의 미국식 자유주의(리버럴리즘)도 낳았고, 자유와 양립할 수 없었던 테크노크라시는 설 자리를 잃었다.
레포레 교수는 “그러나 외조부와 달리 머스크는 권력 장악에 대한 이론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이론이란 바로 로봇을 수단으로 삼아 권력을 움켜쥐는 것이다. 그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머스크가 정부효율부에서 떠나더라도 미국에서 이같은 머스크주의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레포레는 영국 비비시(BBC) 라디오4의 팟캐스트를 통해 2021년 머스크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5부작 시리즈로 주목받았다. 그는 올해 초 그 이후의 상황 변화를 반영해 다시 한번 머스크의 삶과 신화를 파헤치는 8부작 다큐멘터리 ‘엑스맨, 일론 머스크의 뿌리 이야기’(X Man: The Elon Musk Origin Story)를 진행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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