밸류업과 대출 사이 '딜레마'
금융 밸류업 힘주다가…中企 돈줄 막혔다
자본비율 높이려 리스크 관리
기업대출 1조 ↓…8년來 최대
中企 "자금 확보 어려워졌다"
은행들이 주주환원 여력을 확보하기 위해 중소기업 대출을 줄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1일 서울의 한 은행 기업대출 창구 모습. 김범준 기자
금융지주가 밸류업(기업가치 제고)과 대출·투자 확대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졌다. 주주 환원 지표인 보통주자본비율(CET1)을 갉아먹는 위험자산(RWA)을 줄이기 위해 우량 기업 대출만 골라 내주면서다. 이 때문에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의 자금줄이 말라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3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작년 12월 국내 은행의 기업대출 잔액은 138조6312억원으로 전달 대비 9791억원 급감했다. 기업대출이 한 달 새 1조원 가까이 쪼그라든 것은 2016년 12월(1조4024억원) 후 8년 만이다. 중소기업 대출이 급감한 영향이다. 통상 대출이 본격적으로 늘어야 할 1분기에도 증가세가 예년 같지 않다고 한다.
기업대출이 감소한 것은 금융지주마다 밸류업에 힘을 주다 스텝이 꼬였기 때문이다. 금융지주는 자본비율을 바탕으로 주주 환원 규모를 정한다. 자본비율은 자기자본을 위험자산으로 나눠 산출한다. 금융지주 내 위험자산이 많으면 그만큼 배당 등 환원 규모가 줄어든다. 금융지주 산하 은행들이 자본비율을 높이기 위해 비우량 대출을 확 줄이고 나선 이유다.
은행에 기업대출은 대표적 위험자산으로 꼽힌다. 신용등급이 BB+ 미만 기업에 대출하면 대출액의 150%가 위험자산에 포함된다. 부동산담보대출(20~70%) 대비 가중치가 높다. 비상장주식(200%), 벤처투자(400%) 등도 밸류업 시대의 걸림돌로 전락했다.
중소기업의 대출 문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은행연합회에 따르면 4대 은행의 중소기업 담보대출 금리는 작년 말 연 4.90%에서 지난달 연 4.99%, 신용대출 금리는 연 5.51%에서 연 5.73%로 뛰었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고환율에 대출 통로까지 좁아져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대출 퇴짜맞는 中企 "금리 인하기, 은행 문턱 되레 높아져"
밸류업의 역설…우량 기업에만 대출 쏠린다
“기업금융 담당자(RM)들이 현장에서 신규 대출을 받아와도 본점에서 번번이 퇴짜를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위험자산(RWA)을 줄이기 위해 알짜 대출만 골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만난 시중은행장들의 한결같은 토로다. 이른바 ‘밸류업(기업가치 제고) 딜레마’다. 은행들은 자본비율(CET1) 관리를 위해 때아닌 알짜 대출 경쟁에 내몰렸다. 신용도가 낮은 중소기업들은 갈수록 자금 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
◇ 기피 대상 된 비우량 기업대출
31일 금융권에 따르면 4대 시중은행의 개인사업자 대출은 지난해 11월 이후 4개월 연속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월별 증가액이 4조~5조원에 달한 중소기업 대출도 올 들어 월평균 1조원 아래로 떨어지면서 증가폭이 크게 둔화했다. 지지부진한 금융지주 주가를 부양하기 위한 밸류업 정책이 기업대출 통로를 조이고 있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기업 대출을 확대하던 1~2년 전과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실제 은행들은 밸류업에 힘을 주기 위해 비우량 기업대출을 꺼리고 있다. 자칫 대출액의 150%(신용등급이 BB+ 미만)가 위험자산에 포함될 수 있어서다. 신용등급이 없는 소기업은 대출액이 고스란히 위험자산에 반영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신용 평가 시즌을 맞아 신용등급 하락이 예상되는 기업들에는 은행마다 대출을 꺼리는 분위기”라며 “기업대출 대신 일반 주택담보대출이나 상업용 부동산 대출을 선호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금융지주들의 주식 보유(상장주식 130%, 비상장주식 200%)나 벤처 투자(400%) 등은 꿈도 꾸기 어렵다는 전언이다.
◇ 회사채도 안 사는 은행들
은행들은 회사채 대신 국고채 매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위험자산 관리를 위해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3월 은행들이 순매수한 회사채 규모는 2057억원으로 집계됐다. 반면 국고채 순매수액은 7조원대를 넘어섰다. 고금리 회사채를 매수해 이자 수익을 극대화하는 대신 위험자산 관리를 위해 국채 등 우량 채권 위주로 매입한 결과다.
금융지주들이 자본비율 사수를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는 것은 주주 환원 때문이다. KB금융은 CET1 13.5%를 초과하는 분만큼 주주 환원에 사용하겠다고 공언했다. 작년 순이익이 5조원에 달하지만 자본비율을 높이지 못하면 주주환원 규모를 늘릴 수 없는 구조다.
◇ 우량 中企 가로막는 밸류업
금융회사들이 밸류업 딜레마에 빠지면서 중소·중견 기업들은 자금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대기업에 비해 신용도가 낮아 회사채 시장을 이용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은행들마저 자금줄을 죄고 있어서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수출을 앞둔 건실한 업체조차 대출 장벽을 넘지 못할 정도다.
한 알루미늄 제품 업체 대표는 “중국 기업에 맞서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신규 공장 부지를 사놨는데 대출이 끊겨 설비 투자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담보를 제공해도 대출이 나오지 않거나 영업이익률이 4%대인 기업에 터무니없는 고금리를 요구하니 중국과 경쟁해보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할 판”이라고 토로했다.
은행 방침 변화로 대출 연장이 안 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인천의 한 부품업체 대표는 “최근 2년간 매출이 40% 이상 줄면서 적자를 보는 와중에 은행이 대출 만기 연장을 해주기 어렵다고 통보해 다른 은행을 알아보고 있다”며 “앞으로 2~3개월 뒤 사업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걱정된다”고 했다. 한 금형업체 대표는 “은행들이 2022년부터 금리를 연 6%대로 올리고 난 뒤 기준금리가 많이 내렸는데도 대출 만기 연장 때 금리를 낮춰주지 않는다”며 “대출을 갚을 형편이 안 되는 곳들은 사업을 접거나 인력을 정리해 대응하고 있다”고 전했다.
박재원/장현주/정의진/박진우 기자 wonderfu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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