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우 제공
1월 31일 제주 한라수목원에서 백골이 된 구상나무를 만났다. 하얗게 말라붙은 나무는 한라산 꼭대기에서 약 100년을 살다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사이 한라산 구상나무 숲은 많이도 작아졌다.
2024년 9월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한라산연구부에서는 한라산의 구상나무 숲 면적이 100년간 48%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구상나무는 전북 덕유산 이남 산지의 아고산대에 서식한다.게티이미지뱅크, 과학동아 제공
구상나무는 제주도를 포함해 한반도의 산지에서만 서식하는 한국 고유종이다. 오늘날 구상나무의 입지는 독특하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적색 목록에는 '위기(EN)'로 등재됐다. 이는 IUCN이 구상나무를 절멸 가능성이 매우 높은 멸종위기종으로 판단한다는 뜻이다.
한편 한국 환경부에서는 구상나무를 '멸종위기 야생생물 관찰종'으로 지정했다. 아직은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하진 않았지만 보호관찰을 통해 앞으로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할지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국내외에서 구상나무 멸종위기종 지정에 온도 차가 발생한 이유는 현재 한국에서 구상나무를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구상나무는 한라산, 지리산, 덕유산 등 해발 1000m 이상 산지에 분포한다. 특히 한라산의 경우 구상나무로만 이뤄진 숲이 606헥타르(ha)나 돼 한국 최대의 구상나무 서식지로 꼽힌다. 여의도 면적의 2배 넘는 큰 숲에서 살아가는 구상나무의 수는 약 29만 4000그루다.
자연에서 나고 자란 개체를 보려면 전 세계에서 한국, 그것도 산 정상에 올라야 하는 귀한 나무다. 한라산의 구상나무가 사라진다면 전 세계 구상나무 개체 수에 큰 타격이 가해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제주 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한라산연구부는 2024년 9월 한라산 구상나무 숲의 면적 변화를 조사한 결과 구상나무 숲의 면적이 1918년 1168ha에서 2021년 606ha로 48.1%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를 주도한 김종갑 한라산연구부 생물권지질공원연구과 연구관을 만나러 1월 31일 제주로 향했다. 100여 년간 한라산 구상나무 숲에 벌어진 일에 대해 더 자세히 듣기 위해서다.
● 제주의 나무, 크리스마스 트리가 된 까닭은
오늘날 구상나무는 세계 각지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랑받는 수종 중 하나다. 1920년 영국 식물학자 어니스트 윌슨이 한라산과 지리산에서 관찰한 구상나무를 학계에 'Abies koreana'란 학명의 신종으로 보고한 것이 구상나무 해외 진출의 시작점이다.
2012년 국립생물자원관 연구팀의 조사 결과 90품종 이상의 구상나무가 미국, 캐나다, 영국,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의 98개 종묘사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한국 고유종인 구상나무지만 품종을 개량해 특허료를 받는 건 해외 종묘사다. 2020년 기사에선 이 점을 소개하며 생물자원으로 가치 있는 종인 구상나무를 잘 보전해야 한다고 했다.
(왼쪽부터)김종갑 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한라산연구부 생물권지질공원연구과 연구관이 한라수목원 양묘시험포지에서 구상나무 묘목을 소개하고 있다, 양묘시험포지에서 키우는 구상나무는 대부분 한라산에서 직접 씨앗을 채집한 다음 싹을 틔운 것이다. 과학동아 제공
"아름다운 초록 잎 뒷면에는 은백색 빛이 어려 있습니다. 이 나무는 무거운 크리스마스 장식을 매달아도 견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집을 신선한 향기로 가득 채울 겁니다." 캐나다의 한 온라인 식물 판매 사이트에서 본 구상나무의 광고 문구다.
'구상나무'란 이름은 제주도 사투리로 성게를 뜻하는 '쿠살'과 나무를 뜻하는 '낭'의 조합이다. 쿠살낭. 잎이 가지에 달린 모양새가 성게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만져보면 구상나무 잎은 무척 부드럽다. 짧고 뭉툭한 잎에서 신선한 침엽수 향기가 난다.
구상나무 가지 하나를 사무실에 두고 한동안 향기를 맡았던 기억이 있다. 잎이 바싹 마르고 난 뒤에도 향기가 쉽게 없어지지 않았다. 덕분에 오랫동안 좋았다.
'자연 그대로의 구상나무를 볼 수 있을까' 기대하며 제주 한라수목원에 도착하자 김 연구관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한라산에 가시게요? 지금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무리예요. 정상에 눈이 2미터는 쌓였다하던데요." 김 연구관의 말을 듣고 창밖을 보니 한라산 정상이 하얗다.
● 바람과 기후변화 견디며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서
산 위에 오르진 못했지만 한라산에서 살던 구상나무를 만나볼 수는 있었다. 김 연구관이 한라산 정상에서 헬기를 통해 공수한 구상나무 고사목(말라죽은 나무)이 한라수목원에 전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한라산에서 맑고 높은 공기를 마시며 자랐을 나무는 잎사귀 하나 없이 말라붙어 있었다. 줄기에는 나무가 마르며 쪼개진 자국이 가득했다. 그 자국을 가만 보고 있으니 나무의 장례식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백번 말하는 것보다 이렇게 직접 봐야 한라산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어요. 이 나무는 한라산 1800m 지점에서 제가 직접 가지고 온 겁니다. (죽었을 당시) 한 100년은 됐을 나무입니다."
한라산 구상나무 숲은 현재 나무가 선 채로 말라 죽는 '집단 고사'로 속앓이를 하고 있다. 한라산뿐 아니라 지리산, 덕유산에서도 같은 현상이 관측된다. 국립산림과학원은 2019년 멸종위기 고산 침엽수종 실태조사 분석 결과를 발표하며 한라산 구상나무 중 고사목의 비율은 28.2%였으며 지리산에서는 22.9%, 덕유산 25.3%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구상나무의 집단 고사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다.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 변화 탓이란 설이 유력하지만 그마저도 아직은 관측 자료가 적어 확신할 수 없다는 게 김 연구관의 설명이다. 지금은 원인 규명을 위해 자료를 쌓는 단계다.
김 연구관은 "한라산의 구상나무 고사 현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건 2016년 이후의 일"이라고 말했다. 2012년과 2013년 사이 한라산 성판악의 구상나무가 집단 고사한 일이 그 계기가 됐다.
"당시 해발고도 1700m에서 1900m 사이 구간에서 구상나무가 죽어 넘어지고 부러진 모습이 많이 목격됐습니다. 원인 파악을 하기 위해 2016년부터 연구를 시작했죠. 구상나무의 집단 고사 현상 원인에는 여러 설이 있었습니다. 기상 이벤트나 기후변화, 그리고 주변 식생의 변화가 대표적인 이유로 꼽히지만 아직 확신할 수는 없어요."
실제로 2012년에는 7~9월 사이 태풍 볼라벤을 포함한 대형 태풍이 제주도를 네 차례 휩쓸었다. 구상나무가 주로 서식하는 한라산 아고산대(산림대와 고산대 사이 수목한계선의 바로 아래부분. 기온이 낮고 강한 바람이 분다. 구상나무, 분비나무, 가문비나무 등이 산다)는 원래도 바람이 많이 불고 토양층이 두껍지 않은 지역이다.
태풍이 지나가면서 토양이 물에 씻겨 나가 구상나무의 뿌리가 불안정해진 것이다. 게다가 2013년 봄철에는 "역대급 가뭄"이 왔다. 2012년의 태풍을 겨우 버틴 구상나무가 2013년 봄철 가뭄을 겪자 수분 부족으로 죽었다. 이런 산발적인 기상현상을 '기상 이벤트'라고 부른다.
구상나무뿐 아니라 가문비나무, 분비나무 등 아고산대에서 사는 나무가 집단 고사 현상을 겪는 건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나무는 한번 자리를 잡으면 움직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살아가야 한다. 기후변화에 의해 아고산대 기온이 올라가 환경이 변하면 나무는 그 변화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적응하지 못하면 죽는다.
2021년 국립산림과학원은 한라산 구상나무 숲에서 고사목과 생육목(살아있는 나무) 총 120개체의 나이테를 분석하고 이를 지난 32년간의 기상자료와 비교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국립산림과학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한라산 구상나무의 고사 시기가 대부분 봄과 여름 사이였다"면서 "기후변화로 온도가 상승하며 나무가 생장을 시작하는 봄철, 건조한 환경이 조성돼 고사가 일어났다"고 했다.
한편 한라산연구부에서는 100여 년 전 일제가 산림 수탈 목적으로 작성해 둔 '조선임야분포도'와 1948년부터 1979년까지의 항공사진, 2006년, 2015년, 2021년의 정사영상(지표면의 굴곡을 보정해 지도처럼 만든 영상) 자료를 분석했다.
구상나무 숲의 면적이 100년간 48.1% 감소했다는 결과는 이 분석을 통해 나왔다. 한라산 구상나무 숲의 면적은 1900년대까지 연평균 0.24~0.5%씩 줄다가 2006년 이후부터 연평균 감소율이 1.37~1.99%로 급증했다.
1월 31일 제주 한라수목원에서 본 구상나무 고사목. 한라산 아고산대에는 이 같은 고사목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과학동아 제공
재미있는 건 그 사이 한라산에서 급격히 세를 불리고 있는 제주조릿대와 구상나무 사이의 관계다. 구상나무는 천천히 자라는 식물이다. 한라산 아고산대에서 10살 된 구상나무가 20~30cm밖에 안 된다.
반면 제주조릿대는 키가 어른 무릎 정도인 여러해살이풀이다. 뿌리줄기가 길게 뻗으며 두터운 융단처럼 자라는데 이것이 어린 구상나무가 햇빛을 충분히 받지 못하게 막아 생장을 방해한다. 그래서 제주조릿대가 무성한 곳에서 구상나무 군락이 쇠퇴하는 경향도 목격된다.
제주조릿대가 한라산을 뒤덮게 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1970년 한라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말 방목이 금지된 것도 한몫한다는 게 김 연구관의 설명이다. 원래 한라산에서 방목하던 말이 제주조릿대를 먹어치우며 개체수 조절이 됐는데 이제 천적이 사라진 제주조릿대만 살판 났다는 것이다.
김 연구관은 "조릿대가 나쁜 식물은 아니다"라며 "흙을 잘 잡고 있어서 점성이 거의 없는 한라산 토양을 유지해 주는 일등 공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라지 말아야 할 곳에서 자라 천덕꾸러기가 된 제주조릿대를 제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구상나무의 쇠퇴를 '기후변화'로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구상나무의 품종을 알아볼 수 있는 확실한 구분점은 바로 구과(열매)의 색이다. 푸른색과 붉은색, 검은색 등 구과의 색에 따라 푸른 구상나무, 붉은 구상나무,검은 구상나무 등으로 구분한다.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제공
● 한라산 앞마당의 과학자들이 전하는 구상나무의 안부
"기후변화에 의한 영향을 분석하려면 최소한 30년간 축적한 기상 관측 및 개체수 관측 자료가 뒷받침돼야 해요. 지금도 한라산 해발고도 1400~1600m 구간에서는 구상나무 숲이 점차 위로 올라가는 현상이 보여요.
해발고도에 따라서 온도가 낮아지니까 고지대의 구상나무 숲이 확장하는 식이죠. 앞으로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에요. 20년 뒤 후배 연구자가 '옛날에 어떤 할아버지 연구자가 이런 데이터를 만들어놨던데' 하면서 제 연구를 다시 찾아볼지도 모르죠."
그런 미래를 위해 한라산 연구부의 연구자들은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한 번 이상 한라산에 오른다. 드론 촬영이 발전하긴 했지만 조종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만 날릴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배터리 용량도 20분 정도라 드론을 이용하더라도 산을 타긴 해야 한다.
"한라산 아고산 지대까지 올라가는 데 오래 걸리니까 한번 가면 조사 시간이 2~3시간밖에 없어요. 시간싸움이에요. 체력도 받쳐줘야 하죠. 연구 장비에 보호구, 드론까지 짊어지고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일반 탐방로가 아닌 경사가 급격한 곳을 골라 가지요. 제주 앞바다 갈치배의 빛을 보면서 산에 올라가고 다시 밤하늘 별을 보며 내려오는 일상입니다."
한라산연구부 외에도 구상나무를 연구하는 기관은 많다. 환경부,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 국립수목원, 국립공원관리공단, 국립생태원, 국립백두대간수목원까지. 제각기 특화된 연구 분야가 다르다.
한라산연구부는 한라산 앞마당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구상나무 군락지를 자주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점을 살려 한라산연구부의 양묘시험포지에서는 어린 구상나무를 수천그루 키우고 있다. 언젠가 한라산의 구상나무가 한국 정부 기준으로도 '멸종위기종'이 되면 자생지에 새로운 숲을 만들기 위해서다.
김 연구관의 안내를 받아 양묘시험포지 안으로 들어섰다. 5~7년생 어린 구상나무가 수천 그루 자라고 있는 온실이었다. 촉촉하고 상쾌한 나무 향기가 퍼졌다. 구상나무는 천천히 자라는 나무다. 5년을 키워도 연필 한 자루보다 작다. 미리 키워 둬야 복원에 바로 투입할 수 있다.
"구상나무 연구를 한 지 거의 10년이 됐습니다. 지금은 언젠가 한라산 구상나무 숲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어디에 어떻게 구상나무를 심어야 할지 매뉴얼을 만드는 단계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구상나무의 유전체에 대한 연구도 해볼 계획이에요. 유전정보를 이해해야 새로운 품종도 만들고 어떤 유전자가 구상나무를 기후변화에 더 잘 견디게 만들지 파악할 테니까요."
구상나무는 아름다운 나무다. 하지만 높은 산에서 사는 나무 한 종이 사라진다고 해서 산 아래 사는 인간들의 세상이 무너지진 않을 텐데 왜 이렇게까지 구상나무를 지키려고 하는지 궁금했다.
김 연구관은 구상나무는 신생대 3기부터 수백만 년 동안 한라산을 지킨 아고산 지대 생태계의 큰 축임을 강조했다. 구상나무 아래에서 살아가는 풀이 있고 구상나무를 먹고 살아가는 솔알락명나방이나 한라구상나무좀 등 곤충이 있다. 그걸 먹고 살아가는 날짐승과 들짐승도 있다.
"구상나무 뿌리에서만 발견되는 미생물도 많아요. 우리가 모르는 미소 생태계가 있는 거죠. 구상나무가 사라지면 한라산 생태계의 중요한 축이 빠지는 겁니다. 그 영향이 처참할지 가벼울지는 모르죠. 지금까지 그런 현상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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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김소연 기자 leci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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