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의 ‘2025 무해런’ 현장. 참가자들을 위한 기념품이 각종 종이봉투에 담겨 있다. 김광우 기자.
[헤럴드경제=김광우 기자] “기념품이 왜 빵집 봉투에 들었어?”
흔한 마트 봉투부터 의류 쇼핑백, 빵집 종이봉투까지, 언뜻 보면 흔한 종이 쓰레기. 하지만 이는 마라톤 완주자들에게 나눠줄 ‘기념품’이 든 봉투다.
돈을 아끼기 위해서는 아니다. 국내 최초 쓰레기 없는 마라톤 ‘무해런’을 개최하기 위해, 주최 측이 시민들과 함께 모은 귀중한 자원 중 하나다.
마라톤은 적지 않은 쓰레기가 버려지는 행사. 하루 20만개에 달하는 종이컵은 물론 배번표, 음식 포장지, 현수막 등 일회용 쓰레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무해런’에서 이같은 쓰레기들은 모두 사라졌다. 필요한 것은 다회용품과 재사용 물품으로 대체됐다. 참가자들은 무해런을 통해 마라톤의 친환경 움직임이 확대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국내 최초 친환경 마라톤…쓰레기 대신 특별함이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5 무해런’ 참가자들이 대회 전 몸을 풀고 있다. 김광우 기자.
사단법인 지구닦는사람들(와이퍼스)는 지난 23일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국내 최초 쓰레기 없는 마라톤 ‘2025 무해런’을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10km 단일 코스에 550여명이 참가했다.
오전 8시, 본격적인 출발을 앞둔 행사 현장은 여느 마라톤 대회와 다르지 않았다. 제각기 몸을 풀기 바쁜 참가자들 주위로 각종 이벤트 부스가 마련돼, 활기를 더했다.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5 무해런’의 한 참석자 배번표. 배번표는 버려진 종이를 재사용해 만들었으며, 옷핀은 시민들에 기부받아 사용했다. 김광우 기자.
하지만 조금만 둘러보니, 기존 대회와는 다른 점들이 눈에 띄었다. 참가 등록 시 나눠주는 배번표는 갈색으로 돼 있었다. 버려진 종이로 만든 재사용 배번표였다.
이를 옷에 고정하기 위한 ‘옷핀’도 평소와 달랐다. 제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대회를 위해 시민들로부터 기부받은 옷핀을 사용한 결과다.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5 무해런’ 현장. 물품보관소에서는 흔히 쓰는 비닐백 대신 재사용 종이봉투가 제공됐다. 안내판은 종이상자를 재활용해 만들었다. 김광우 기자.
짐을 맡기기 위해 찾은 물품보관소의 풍경도 남달랐다. 흔히 쓰는 비닐백 대신 재사용 종이봉투가 제공됐다. 이에 의문을 품는 참가자들도 없었다. 모두가 익숙한 듯이 종이봉투에 옷을 담아 보관했다.
그 흔한 현수막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각기 다른 모양을 한 종이박스가 형형색색으로 꾸며져 있었다. 본격적인 대회가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미 적지 않은 양의 일회용 쓰레기들을 줄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5 무해런’ 현장 모습. 출발 지점에 현수막 대신 종이박스로 꾸민 안내판이 눈에 띄었다. 김광우 기자.
이날 친구의 추천으로 대회에 참가한 직장인 장준영(29) 씨는 “아직 대회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전혀 불편함이 없는 데다 특별한 대회라는 점에서 만족감이 높아지고 있다”며 “얼른 10km를 달리고 다른 변화들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종이컵 쓰레기 0개로…간식까지 ‘친환경’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5 무해런’ 급수대에서 다회용기에 담긴 물을 나눠주고 있다. 김광우 기자.
실제 대회가 시작되자 특이점은 더 눈에 띄었다. 가장 큰 변화는 ‘일회용 컵’이 없다는 것. 통상 마라톤 대회에서는 일회용 컵에 물이 제공된다. 달리면서 물을 마신 참가자들은 그대로 쓰레기를 바닥에 버린다. 국내 유명 대회에서는 하루 최소 20만개의 일회용 컵이 버려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날 반환점을 지나 위치한 급수대에서는 ‘아리수(서울 수돗물)’이 담긴 다회용컵이 놓여 있었다. 참가자들은 물을 마신 뒤 간이 욕조로 만든 통에 컵을 반환했다. 대다수 참가자가 군말 없이 원칙을 따랐다. 급수대 주변이 쓰레기로 뒤덮여 있는 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5 무해런’ 급수대에서 참가자들이 다회용기에 담긴 물을 마시고 있다.[인스타그램 갈무리]
‘쓰레기 없는 마라톤’의 정체성은 대회가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완주자들에 제공하는 기념품은 시민들이 쓰고 남은 종이봉투에 제공됐다. 모두 주최 측이 SNS 홍보 등을 통해 시민들에게 받은 봉투다. 그 안에는 친환경 실천을 위한 ‘다회용기’와 나무 칫솔 등이 들어 있었다.
금속 재질의 완주 메달은 ‘종이’로 대체됐다. 정확히는 본인의 배번표를 접어 꽃 모양의 메달을 만들 수 있었다. 작은 쓰레기라도 버려지지 않도록, 재사용 종이를 또다시 재사용해 기념품을 만들 수 있었던 셈이다.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5 무해런’에서 참가자들에 제공된 비건 도넛(왼쪽)과 비건 비빔밥(오른쪽). 김광우 기자.
참가자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던 것은 대회 후 제공되는 간식. 비건 도넛과 비건 비빔밥, 그리고 음료가 제공됐지만 이 또한 쓰레기를 동반하지 않았다. 도넛은 그릇 대신 뻥튀기를 사용했고, 비빔밥과 음료는 다회용기에 제공됐다.
평소 친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대회에 참석했다는 정진우 씨는 “오히려 다른 마라톤보다 간식이 더 풍족하게 제공되는데도, 쓰레기는 하나도 남지 않는 게 신기했다”며 “맛있는 비건 음식도 먹고 좋은 일에 동참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5 무해런’에서 참가자들이 한켠에 마련된 종이박스에 대회 응원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김광우 기자.
또 이날 행사가 마무리된 자리에는 쓰레기봉투가 쌓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에 참가자들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현장을 떠났다. 쓰레기가 없다고 해서 모자란 것은 없었다. 되레 참가자들은 다른 대회보다 더 많은 이벤트를 경험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날 처음 10km 대회에 참가했다는 직장인 박한 씨는 “직전에 나간 마라톤에서는 필요도 없는 메달을 주고, 빵 하나 주면서도 일회용 봉투에 담아줘 불만이 있었는데, 이번 대회에서는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었다”고 말했다.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2025 무해런’에서 황승용 와이퍼스 이사장이 발언하고 있다. 김광우 기자.
이같은 친환경 마라톤 문화가 확산했으면 좋겠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최근 마라톤에 심취해 있다는 배우 이시우(25) 씨는 “기존 마라톤의 경우 행사 출발 지점부터 급수대 주변 주로까지 쓰레기로 난장판이 되는 경우가 있다”며 “쓰레기 없는 대회가 가능할까 했는데, 오늘 경험해 보니 앞으로의 변화도 기대된다”고 말했다.
무해런을 주최한 황승용 와이퍼스 이사장은 “현장에서 쓴 대부분 자원을 시민들로부터 지원받아 재사용하는 등 많은 분들의 노력을 모아 친환경 마라톤을 기획했다”며 “마라톤 문화를 바꾸는 하나의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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