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한국 신영선 기자] "좋은 바둑은 한 명의 천재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 '승부'에서 라이벌 구도의 두 주인공을 두고 나온 대사다. 스포츠계에는 심심치 않게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지며 보는 관객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곤 한다. 축구계에는 메시와 호날두가 있고, e스포츠에는 임요환와 홍진호가 있다. 최근 예능에서 돋보이는 활약 중인 서장훈도 농구를 하던 시절에는 현주협과 강력한 라이벌 구도로 인기를 끌었다. 바둑계에는 제자가 스승을 이긴 '청출어람' 라이벌 조훈현과 이창호의 이야기가 회자되곤 한다. 이들의 흥미로운 라이벌 서사를 다룬 영화 '승부'다.
바둑 신동 이창호는 바둑 레전드라 불리는 조훈현의 눈에 들어 제자가 된다. 서울로 상경해 그의 집에 살며 문하생이 된 이창호는 신발끈도 제대로 매지 못하던 어린 꼬맹이에서 훗날 스승마저 꺾어버리는 바둑기사로 성장한다. 영화는 운명의 장난처럼 스승과 제자로 만나 호적수가 되는 두 천재의 만남과 성장, 고뇌의 과정을 적절한 유머와 따뜻한 감성으로 잘 버무리며 이를 지켜보는 주변인물들과의 관계성 역시 촘촘하게 그려낸다.
두 바둑 기사의 이야기를 다룬 만큼 바둑 경기가 자주 펼쳐지는데 이야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연출을 맡은 김형주 감독마저 바둑에 문외한이었다고 토로했을 정도이니 관객들도 충분히 즐길만하다. 대국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와 몸짓만으로 이들이 호각을 다투고 있고, 또 이기고 있다는 상황을 예측케 한다. 바둑의 룰이나 기초를 일일이 설명하기보다는 심리 묘사를 이용한 영리한 연출법을 선택해 관객들의 부담을 줄인 모양새다. 또 포석, 사활 등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바둑 용어가 친근감을 자아내며, 일색 바둑(한가지 색으로만 바둑 두기), 다면기(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동시에 대국하는 것)까지 독특한 대국도 등장해 영화적 묘미를 더한다.
출연하는 배우들마다 구멍 없는 연기력 또한 일품이다. 실제 이창호가 조훈현의 제자가 된 시기가 80년대인 만큼 당시의 시대상을 잘 살린 소품이나 배우들의 복장도 볼거리다. 재밌는 건 이창호 역을 맡은 유아인과 아역 김강훈의 연기다. 어린 시절과 성인이 된 시간의 간극을 자연스럽게 메꾼다. 뛰어난 천재성으로 항상 자신만만하고 당차던 이창호가 성장해 진중한 성격으로 바뀌고 또 스승을 이기며 경험했을 고뇌들이 매끄러운 흐름으로 이어진다. 다만 마약 투약 혐의로 물의를 빚은 유아인이 비중 있게 등장하는 만큼 껄끄러운 느낌은 남지만 이병헌과 투톱 주연인 만큼 편집이 힘들고 극의 흐름상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이병헌의 연기 역시 두말할 것 없다. 매 바둑 경기마다 강력한 존재감을 표출하는데 그의 표정, 손짓 하나에도 눈 빠지게 몰입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 아들과 오목을 두며 바둑알을 판에 내려놓은 연습을 했다는 이병헌의 디테일한 노력이 스크린 안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승부'만큼 이 영화에 잘 어울리는 제목도 없다. 액션물도 아니고 배우들은 가만히 앉아 바둑판만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경기만 시작됐다 하면 관객들마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살벌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누군가에게는 때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 펼쳐지기도 한다. 김형주 감독이 왜 심지 굳게 이들의 인생을 카메라 안에 담아내야 했고, 또 개봉을 염원했는지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승부'는 오는 26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 러닝타임 115분.
스포츠한국 신영선 기자 eyoree@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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