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넷플리스 시리즈 폭싹>
[이정희 기자]
(* 이 글은 시리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폭싹 속았수다>는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 절기에 맞춰 풀어나간다. 부산까지 야반도주를 감행하던 애순과 관식의 풋사랑이 봄이었는가 하면, 두 사람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시절은 뜨거운 여름이 되었다. 이제 장년이 된 애순과 관식, '추수'의 계절 가을처럼 이제 자식들 다 키워 좋을 날만 있을 줄 알았는데, 가을의 변덕이 또 이 가정을 덮친다.
부모에게는 가을이 되어야 할 계절이지만, 그들의 자식은 이제 막 봄이고 여름의 초입이 되는 시절이다. 이 엇물리는 계절의 요동치는 기세를 어찌 막을 수 있겠나.
가난한 대학생 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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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
ⓒ 넷플릭스 |
아이들의 성장과 함께 자연스레 드라마도 이제 문소리, 박해준으로 바뀐 애순과 관식 대신, 다시 금명이 된 아이유와 신새벽의 은명 이야기가 비중이 높아진다. 서울대를 간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다 이룬 것처럼 같았지만 가난한 대학생 금명의 삶은 녹록지 않다.
"참 이상하다. 부모는 미안했던 것만 사무치고, 자식은 서운했던 것만 사무친다. 그래서 몰랐다. 내 허름하기만 했던 유년기가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만들었던 요새였는지..." - <폭싹 속았수다> 중에서
바깥에 나가서는 반듯하고 예의 바른 금명이지만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할 때는 '몰라~', '알아 뭐 해~', 가 접두사처럼 튀어나온다. 그래도 엄마는 간절하게 말해보라 하고. 그 아이의 말에 엄마는 접으려던 노점을 다시 펴고, 집을 줄여가며 일본으로 유학도 보낸다. 동생 은명이 대들보는커녕 구멍이라고 비아냥거려도 엄마는 그저 더 해 줄 것이 없어 안쓰럽기만 하다.
예전 광례 엄마는 애순 보고 웬수라고 말했다. 자기 삶이 부모 빚잔치에, 전남편 병수발, 그리고 새로 본 남편까지 모두 자기 등에 업히려고만 하는데 그 어린 애순이가 자기 등에서 내려와 자꾸 자기를 거들려 하니 그게 웬수라고. 그렇게 광례 엄마는 최고의 역설법으로 어린 딸의 착한 마음씨를 안쓰러워했다.
그 착한 딸은 결국 뭍으로도 나가지 못하고, 일편단심 광식과 가정을 꾸려 세 아이, 아니 두 아이를 키웠다. 엄마로서는 갖은 애를 다 썼지만, 뭍으로 나선 딸의 세상은 버겁다.
"부모는 모른다. 자식 가슴에 옹이가 생기는 순간을. 알기만 하면 다 막아 줄터라. 신이 모르게 하신다. 옹이 없이 크는 나무는 없다고 모르게 하고. 자식의 옹이가 아비 가슴에는 구멍이 될 걸 알아서 쉬쉬하게 한다." - <폭싹 속았수다> 중에서
극장에서 늦게까지 표를 팔고 산동네의 허름한 하숙집까지 오가며 지내는 삶은 연탄까스만 아니면 어찌어찌 막아볼 도리가 있었지만, '결혼'이라는 인생 중대사 앞에서는 도무지 딸이 가진 구차함을 가려볼 도리가 없다.
영범의 어머니는 국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금명을 뭘 가르쳤냐며 비웃는다. 결국 참다 못한 애순은 금명의 국자를 대신 쥔다. 그리고는 말한다. 금명도 자기 들에게는 '화초'처럼 곱게 키운 아이라고. 그래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았다고. 아니 귀해서 가르칠 수가 없었다고.
격 맞지 않는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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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
ⓒ 넷플릭스 |
7년 연애 끝에 하는 결혼인데도, 예복까지 맞추고 온 날, 영범의 엄마는 두 집안이 힘껏 이 결혼을 막아보자고 말한다. 이유는 단 하나, 도무지 격이 맞지 않는 집안이라니.
집안의 격은 정말 차이가 났다. 자식을 대하는 부모의 격에서 말이다. 상견례 자리에서도 대놓고 무시하던 영범의 부모, 영범의 어머니는 아들 영범에게서 자신의 지분이 70%가 넘음을 주장한다. 영범이 사는 아파트가 자신이 사준 거란다.
반면 금명의 부모는 자신들이 애지중지 키운 금명이 시댁 어른이 될 사람들 앞에서 쩔쩔매도, 그들이 무례해도, 제주에서의 혼인을 엎어버려도. 그저 금명이 영범을 사랑한다니 참는다.
드라마는 광례에게서, 애순으로, 금명으로 그들의 운명이 질기에 이어지는 듯 설정을 하면서도, 지게꾼이라 자조했던 광례에게서, 식모 팔자라 하소연했던 애순을 넘어, 이제 그 질곡의 운명을 걷어차는 금명으로 운명의 문턱을 넘어선다.
애순과 관식이 보여주는 부모의 '숭고함'은 파혼 이후에 더 돋보인다. 천 번쯤 밥은 먹었냐는 걱정의 언어로 결국 딸을 돌아오게 만든 애순 부부는 딸을 말 그대로 먹여 살린다. 그 딸이 스스로 다시 일어설 힘을 가질 수 있게 되도록 그저 보살필 뿐이다. 그리고 말한다. 걱정하지말라고. 너는 다 잘 한다고.
아버지와 함께 배를 타고 나선 금명, 아버지는 금명에게 떠오르는 해의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금명이 본 것은, 가난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진심, 그 너르고 깜깜한 바다에 그 누구보다 빨리 나가던 마음, 자기가 조금 더 애를 써서, 자식들이 조금 덜 힘들게 살아갔으면 하는 그 아비의 마음에서 희망을 찾는다.
돌아온 금명을 거둬 먹이는 애순과 관식을 보고 금명은 자신의 부모가 다시 자신을 키운다고 한다. 부모는 자식을 언제까지 키워야 할까. 다 키운 아들에게서 자기 지분을 주장하며 기어이 그 아들의 사랑을 제멋대로 하려는 어미와, 그저 갖은 애를 쓸 뿐 내색하지 않는 애순과 관식, 그건 시대물과 같은 1990년대의 이야기를 넘어,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 된다.
평생을 애를 쓰고 살아도 여전히 '가난'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전전긍긍하는 애순과 관식, 그 가난한 부모를 통해 역설적으로 '가진 것'으로는 채워질 수 없는 부모의 자리가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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