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지훈의 3인칭 관객 시점] 국립극단 연극 만선>
[안지훈 기자]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연극 <만선>이 2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1964년 국립극단 공모에 당선된 <만선>(천승세 작)은 섬에서 어업을 하며 평생을 보낸 '곰치'와 그 일가족의 삶을 이야기한다. 당시 사회가 조명하지 않았고, 특히 산업화와 고도성장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았던 서민의 삶을 다룬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았다.
다시 돌아온 <만선>의 무대는 기울어져 있다. 곰치네 가족이 사는 집은 외형도 허름할뿐더러 무대와 같이 기울어져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무너질까 아슬아슬하다. 그런 세상 위에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 역시 넘어지지 않으려 균형을 잡고 서 있는데, 어느 순간 이런 설정이 그들의 고되고 불평등한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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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만선> 공연사진 |
ⓒ 국립극단 |
착취, 그리고 자본주의의 잔혹성
초반 크고 신나는 징 소리가 울린다. 곰치는 물고기가 배에 가득 찰 만큼 어획량이 많다고, '만선'이었음을 자랑하며 등장한다. 갑작스러운 횡재에 곰치와 일가족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이들은 오늘의 만선을 희망찬 징조로 여기며, 가난에서 벗어날 내일을 기대한다.
하지만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다. 곰치가 타고 다니는 배의 주인 '임제순'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바뀐다. 임제순은 곰치의 빚 변제를 말하며 잡은 물고기를 모두 가져가 버리고, 빚을 다 갚기 전까지 배를 빌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빌려 타는 배는 생계 수단이나 다름없고, 마침 물고기가 이례적으로 많은 시기다. 임제순 앞에서 곰치는 절대적 약자의 지위에 머무르고, 이를 알고 임제순은 자신이 더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간다. 수탈과 착취가 모두 드러난 상황임에도 곰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없고, 배를 다시 빌려 타기 위해 곰치는 착취가 공고화되는 상황을 받아들인다.
작품의 배경은 아직 산업화의 물결이 닿지 않은 전라도의 섬마을이다(그래서 등장인물들은 모두 당시 전라도 사투리를 진하게 구사한다). 20세기 말부터 한국에 들이닥친 신자유주의의 파도도 닿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가 만들어졌고, 때론 더 적나라하게 드러났음을 <만선>은 보여준다.
개인이 일종의 부품처럼 여겨지는 자본주의적 현상 역시 드러난다. 후반부에 이르러 배가 난파되고 사람이 실종되었을 때, 선주 임제순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배만 걱정한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고 말하며 자신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범쇠'의 모습도 상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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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만선> 공연사진 |
ⓒ 국립극단 |
"누구를 위한 만선이여?"
만선이 곰치네 가족의 삶을 나아지게 할 것이란 기대도 잠시, 만선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은 따로 있음이 드러난다. 선주, 자본주의의 용어로 하자면 자본가다. 하지만 곰치는 이를 지켜보고도 만선을 향한 집념을 거두지 않는다.
다시 배를 타고 나가 만선을 거듭하면 자신의 삶이 나아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만선이라 하더라도 그 이익을 모두 곰치가 가져갈 수 없음에도, 무엇보다 만선이 원한다고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님에도 말이다. 그래서 곰치가 그렇게 갈망하는 '만선'은 일종의 허상처럼 느껴진다.
오늘날에도 '만선'과 같은 기제가 존재한다. 자본주의하에서 성공의 루트로 제시되는,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히 자기 계발하며 시장의 흐름에 주목하여 적극적으로 저축하고 투자하는 것. 원하고 노력하기만 한다고 무조건 달성할 수도 없거니와, 달성한다고 하더라고 성공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만선'과 닮았다.
만선을 향한 갈망은 현대 사회에 들어서며 더 강하게 작용하고, 이는 곧 약자인 다수의 개인을 체제의 영속에 기여하도록 만든다. 곰치가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만선을 갈망하고, 만선을 거듭해 자신의 배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처럼 말이다(물론 곰치는 자신의 배를 장만하지 못했다).
연극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비극적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만선이 실체 없는 허상이었음이 속속 드러난다. 비극의 그림자가 참혹한 현실을 알려오는 그 순간, 곰치의 딸 '슬슬이'가 울부짖으며 내뱉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대체 믓이(무엇이) 만선이여? 누구를 위한 만선이여?"
한편, 곰쇠와 아내 구포댁이 비극적 결말을 받아들인 채 무기력하게 서 있는 마지막 장면은 압권이다. 이때 5톤의 물이 폭풍우와 거센 파도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무대 위 깃발은 심하게 펄럭이고, 곰쇠와 구포댁은 모진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는다. 이때 그 무엇도 곰쇠와 구포댁을 막아주지 않는다는 것도 무기력한 개인이 처한 상황을 상징하는 듯하다.
<만선>은 명동예술극장에서 3월 30일까지 공연된다. 김명수가 곰치를, 정경순이 구포댁을 연기하며, 원로 배우 김재건이 임제순에 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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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만선> 공연사진 |
ⓒ 국립극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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