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C버클리대-샌프란시스코대 연구
남태평양 피지섬의 야자수 위에 누워 있는 피지 볏 이구아나( Brachylophus vitiensis ). 오늘날 피지와 통가에 서식하는 네 종의 이구아나는 지난 3400만년 동안 이 섬에 정착한 조상의 후손으로,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8000㎞을 래프팅해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니컬라스 헤스
이구아나는 주로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카리브해 제도에 사는 도마뱀 무리 동물이다. 오래전 죽은 나무를 타고 중앙아메리카에서 서쪽으로 1000㎞ 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까지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종종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이구아나가 굵은 나뭇가지나 죽은 나무덩굴을 타고 물 위를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된다. 하지만 남태평양 피지에서 발견된 이구아나가 어떻게 태평양을 건너 훨씬 먼 외딴 섬에서도 살게 됐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대 연구진은 17일 남태평양 피지에 사는 이구아나가 약 3400만년 전 북미 서부 해안을 떠나 8000㎞를 항해한 뒤 이 고립된 남태평양의 섬들에 도착한 것으로 분석됐다고 국제 학술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공개했다. 이는 땅에 사는 척추동물 가운데 가장 긴 바다 횡단 사례로 평가된다.
수상 분산(Overwater dispersal)은 땅 위 생물이 바다를 건너 다른 육지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보통은 한 번에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섬과 섬을 잇는 여러 단계를 거쳐 바다를 건넌다. 새로 형성된 섬에 인간과 동식물이 이주해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에 적응해 진화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사용된다. 이런 식민화 과정은 찰스 다윈이 주장하는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 이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피지 오발라우 섬에서 발견된 중부 피지 줄무늬 이구아나( Brachylophus bulabula) 수컷. /미국지질조사국
이번 연구가 나오기 전까지 생물학자들은 피지섬에 사는 이구아나가 한때 태평양에 널리 퍼져 살았지만 이후로 멸종돼 서태평양의 유일한 이구아나과 동물로 남은 조상에게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구아나가 남미 열대 지역에서 남극이나 호주를 거쳐 이동했다는 설을 내놓기도 했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전적, 화석적 증거는 아직 없다.
연구진은 이번에 내놓은 새 분석이 기존 가설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밝혔다. 연구진에 따르면 현재 피지섬에 사는 이구아나 조상이 도착한 시기는 이 화산섬이 형성되는 시기와 비슷한 3400만년 전 이후로 추정된다. 이는 피지섬 이구아나인 브라킬로푸스가 가장 가까운 친척관계인 북미 사막에 사는 디프소사우르스와 유전적으로 갈라진 시기와 일치한다.
파충류학자인 사이먼 스카르페타 샌프란시스코대 조교수는 “피지섬의 이구아나는 북미 사막에서 사는 이구아나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으로 발견했다”며 “섬이 형성되던 시기와 유전적으로 갈라진 시기가 일치한다”고 했다.
한편에선 이구아나가 큰 바다를 건넜다는 이번 분석에 대해 믿기 어렵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논문 공동 저자인 지미 맥과이어 UC버클리 교수는 “북미에서 직접 피지에 도착했다는 건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리지만 다른 모델은 이구아나가 피지에 도착한 시기와 시간상으로 맞지 않는다”며 “피지섬이 솟아나자마자 이구아나가 살기 시작했다는 점은 엄청난 사건”이라고 말했다.
항해 전문가들에 따르면 현재 항해술로는 순풍을 타면 캘리포니아에서 피지까지 약 한 달이 걸린다. 피지섬의 이구아나 조상은 죽은 나무를 타고 무풍대를 지나 적도를 지나 피지와 통가까지 가는 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충류학자들은 이구아나의 신체 특성이 이런 장거리 여행에 유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구아나는 몸집이 크고 풀을 먹고 사는데 오랜 시간 음식과 물이 없어도 살 수 있다. 만에 하나 표류하던 뗏목이 뿌리째 뽑힌 나무였다면 그 자체가 먹이를 제공했을 것으로 연구진은 보고 있다.
스카르페타 교수는 “이구아나가 무리 지어 살며 알을 낳은 나무가 사이클론에 쓰러지자 이를 뗏목 삼아 타고 해류를 따라 바다를 건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된다”고 말했다.
지구상의 이구아나 아목은 2100종 이상이 있다. 카멜레온과 아놀, 수염도마뱀, 뿔도마뱀과 같은 동물도 여기에 포함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구아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서반구 도마뱀과인 이구아나과(Iguanidae)다. 지난 1758년 스웨덴 생물학자인 칼 린네가 이구아나 이구아나(Iguana iguana)라고 묘사한 중남미의 널리 퍼진 녹색 이구아나가 여기에 속한다. 현재 카리브해와 북미, 중남미의 열대, 아열대, 사막 지역에 사는 이구아나과(Iguanidae)는 45종에 이른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명물인 바다 이구아나와 미국 남서부의 척월라도 포함된다.
갈라파고스의 바다 이구아나( Amblyrhynchus cristatus )는 세계에서 유일한 바다에 사는 도마뱀이다. 오래전 나무를 타고 중앙아메리카에서 서쪽으로 1000㎞ 떨어진 갈라파고스제도까지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마틴 하비
피지 이구아나는 태평양 한가운데 살고 있는 이질적인 종으로 분류된다. 피지와 통가에 사는 네 종은 현재 서식지 감소, 침입성 쥐의 포식, 이국적인 애완동물 무역에 먹이를 주는 밀수업자의 착취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과학자들은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몇 개의 화석을 근거로, 지금은 멸종된 이구아나류의 조상이 태평양 연안에 살면서 태평양 중앙으로 서식지를 옮겼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들이 베링해를 거쳐 미국에서 육지와 바다로 이동하면서 인도네시아와 호주를 거쳐 이동했거나, 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극을 거쳐 이동했을 수 있다고 봤다. 또 남아메리카 대륙의 서쪽 연안 먼바다에서 북상하는 해류인 훔볼트 해류를 타고 남미에서 뗏목을 타고 남태평양으로 이동했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피지 이구아나와 나머지 모든 이구아나의 관계에 대한 앞선 유전자 연구에서는 이들 간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UC버클리 연구진은 이번 연구에 앞서 이구아니아의 모든 속에 대한 포괄적인 조사에 착수해 가계도를 만들었다. 연구진은 전 세계 박물관 소장품에 보관된 200개 이상의 이구아나 표본의 조직과 4000개 이상의 유전자에서 게놈(유전체) 서열을 수집했다.
3400만년 전 세계 지도. 브라킬로푸스가 피지에 식민지를 건설할 것이라는 가설 시나리오를 보여준다. 새 연구에 따르면 가장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는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피지로 이어지는 진한 파란색 화살표로 표현된다. 작은 빨간색 별은 화석 이구아나이드가 발견된 북아메리카 지역을 나타낸다. 현대 이구아나이드의 분포 범위(아메리카, 피지, 통가)는 밝은 파란색으로 표시했다. /사이먼 스카르페타와 짐 맥과이어
데이터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한 가지 결과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피지 이구아나인 브라킬로푸스(Brachylophus)가 디프소사우르스속 이구아나와 가장 가까운 친척뻘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중 가장 널리 퍼진 종은 북미 사막 이구아나인 디프소사우루스 도르살리스(Dipsosaurus dorsalis)로, 미국 남서부와 멕시코 북부 사막의 뜨거운 열기에 적응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속의 다른 종은 캘리포니아만(코르테스해)의 산타 카탈리나 섬에도 살고 있다.
스카르페타 교수는 “이구아나와 사막 이구아나는 특히 굶주림과 탈수에 강하다”며 “척추동물이나 도마뱀 무리 중에 식물 덩어리를 타고 태평양을 가로질러 8000㎞를 여행하던 무리가 있다면, 바로 사막 이구아나와 같은 조상일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의 분석 결과를 보면 브라킬로푸스와 디프소사우루스라는 두 계통은 약 3400만년 전에 갈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피지 이구아나의 기원에 대한 이전 이론과 맞지 않은 것이다.
맥과이어 교수는 “브라킬로푸스가 어디에서 왔는지 뿌리를 정확히 알 수 없다면 그들이 온 곳도 거의 어디든 될 수 있다”며 “갈라파고스에 바다와 육지 이구아나가 있고, 거의 확실히 본토에서 섬으로 퍼졌기 때문에 브라킬로푸스가 남미에서 유래했다고 상상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지섬에 사는 이구아나 조상이 도착한 시기는 이 화산섬이 형성되는 시기와 비슷한 3400만년 전 이후로 추정된다. 하늘에서 촬영한 남태평양 피지섬. /크리에이티브 커먼스
하지만 이번 연구를 통해 피지섬의 이구아나 조상이 남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은 것으로 분석됐다. 스카르페타 교수는 “피지와 통가 외의 다른 섬에도 이구아나가 살 수는 있었지만 화산섬은 쉽게 나타났다가 쉽게 사라지는 특성이 있다”며 “다른 태평양 섬에 이구아나가 살았다고 해도 그 증거는 아마도 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구아나 도마뱀의 유전체 전체 데이터를 분석하고 그들의 진화적 관계에 추가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또 시간과 공간에 따른 이동과 상호 작용을 추론하는 연구도 계속할 예정이다.
참고 자료
PNAS(2025), DOI : https://doi.org/10.1073/pnas.231862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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