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범 검거율 74%→56% 뚝 떨어지고 장기미제 늘어
거야가 지배할 22대 국회는 ‘검찰 힘 빼기’ 가속화 예고
(시사저널=이혜영 기자)
출발은 '검찰 개혁'이었다. 검찰 환부를 도려내겠다며 출항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호는 2024년 5월 현재 종착지를 알 수 없는 곳을 향해 간다. 배를 돌려야 하지만 거야(巨野)는 검수완박을 '더 확실히' 밀어붙이겠다는 공언을 반복한다. 현장에 드리운 혼돈과 사각지대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됐다. 사기공화국 오명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기범죄 천국'이라는 참혹한 수식이 따라붙는다.
5월8일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여덟번째 전세사기 희생자 추모 및 대책 마련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직 판사, 《빨대사회》 통해 검경 수사권 조정 부작용 비판
"사기범죄 조직들의 황금시대가 도래했다. 지금까지는 누군가의 목덜미에 조심스럽게 빨대를 찔러보던 국제 사기범죄 조직이 수사기관과 법원의 눈치를 보지 않고 과감하게 빨대를 꽂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국회의 결정으로 인하여 수사와 형사재판이 결코 정의로울 수 없게 됐다."
형사법 전문가인 모성준 대전고등법원 판사(48·사법연수원 32기)가 저서 《빨대사회》를 통해 진단한 한국의 현주소다. 모 판사는 70년간 이어온 형사사법 체계를 한순간에 뒤흔든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개정에 따른 부작용이 결국 범죄자와 범죄 조직의 '사기 칠 결심'을 북돋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고 직격한다. 국가 시스템이 뒷걸음질하는 사이에 국제 범죄 조직의 사기 유형과 방식은 고도화를 거듭하면서 거대한 '사기 플랫폼'에 사실상 전 국민이 노출되는 '기이한 사회'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기 피해자가 발생한다. 매일 5500명에 달하는 시민이 보이스피싱, 다단계·보험·사이버사기, 유사수신행위, 시세조종, 주식리딩방·외환거래사기, 로맨스 스캠,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다. 사기범죄로 인한 재산 피해액은 연간 40조원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세사기를 당한 30대 여성은 최근 "잘 살고 싶었지만 이 나라에서 서민은 죽어야 하느냐"는 말을 남긴 채 스스로 생을 등졌다. 벌써 8번째 비탄의 행렬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재인 정부가 들고나온 것이 검경 수사권 조정과 검수완박 입법이다. 검찰의 막강한 권한을 분산하겠다며 추진한 개혁은 '수사 오너십(ownership)' 해체를 낳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사 전문가인 사법경찰이 1차 수사를 맡고 법률 전문가인 검사가 이를 지휘하며 사건 전반과 법 조항을 검토, 사안에 따라 보완수사를 거쳐 기소하는 과정 전반에 검경의 유기적인 상호작용이 있었는데 이 구도와 절차가 무너졌다는 평가다.
모 판사는 "제한된 인력과 자원으로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고, 신속·적정하게 사건을 종결하기 위한 최적화된 업무분담 체계가 정치권에 의해 망가졌다"고 쓴소리를 냈다. 결과적으로 '정치'가 서민의 목을 범죄자의 빨대 아래 가져다놓은 꼴이 됐다. 굳건해야 할 형사사법 체계의 문이 "사기범죄 조직에 활짝 열린 것"이라고 진단한 모 판사는 "국회가 국가의 전체 수사 권한을 토막 내면서 사기범죄 조직에 날개를 달아줬다"고 비판했다.
경찰이 수사종결권을 갖고, 검찰은 지휘권을 상실한 동시에 직접 수사 범위가 대폭 축소된 여파로 생긴 부작용과 공백은 곧바로 '민생'을 덮쳤다. 민생과 직결된 사건 수사와 처리는 지연에 지연을 거듭하는 추세다. 수사 완결까지 전문성이 확보되지 않은 경찰로 사건이 집중되고, 검경을 오가며 '핑퐁'을 반복하는 사이에 범죄자와 권력자는 시간을 벌고 피해자와 서민은 벼랑 끝으로 바짝 내몰리는 비극이 이어진다.
경찰청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국내 발생 사기범죄는 200만 건에 육박한다. 코로나19가 확산하던 2021년(29만 건)을 제외하면 매년 30만 건을 웃돈다. 반면 사기범 검거 건수는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2018년 74.9%를 기록했던 검거율은 수사권 조정 등이 본격화된 후 60%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2022년엔 58.9%, 지난해엔 56.6%에 머물렀다. 사기범죄 가담자가 실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건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는 수사의 한계로 법망을 빠져나가는 비율은 훨씬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범죄자는 시간 벌고, 피해자는 벼랑으로
'단군 이래 최대 사기범죄' 타이틀이 수시로 바뀌는 상황에서 처리기간이 6개월을 초과한 장기사건 비율도 수사권 조정 전인 2020년 11.8%에서 2022년 32.8%로 후로 3배 가까이 늘었다.
검찰 출신 허인석 법무법인 동인 변호사는 검수완박 입법 이후 상황에 대해 "수사와 사법 절차 지연 현상이 뚜렷해졌고 범죄 피해자의 권리구제 범위도 좁아졌다"고 짚었다. 허 변호사는 "경찰이 불송치한 사건을 검찰이 보완수사를 요구하며 돌려보낼 경우 사건번호가 새로 부여되는데, 일련의 과정 속에서 처리 결과와 지연 등에 대한 기관 간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져 악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며 "사건번호를 일원화해 관리하는 등 보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김주연 한국사기예방국민회 대표는 "정치권 고래 싸움에 범죄 피해자만 새우 등 터진 격"이라고 날을 세웠다. 김 대표는 "턱없이 낮은 양형으로 국내외 사기꾼들이 창궐하는 상황에 수사 체계에까지 많은 구멍이 생겼고, 사건 처리 속도가 느려지며 2·3차 피해를 보고 있다"고 탄식했다. 김 대표는 "경찰에 고소·고발을 하고 (송치·불송치) 결정을 받는 데만 1년을 훌쩍 넘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범죄 조직이 매우반기는 이 총체적 난국을 어떻게 개혁으로 볼 수 있느냐"며 "22대 국회에서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22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야권은 검찰 '힘 빼기'에 더 큰 '힘'을 쓰겠다는 입장이다. 검찰을 공소 제기·유지 기능만 하는 '기소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검수완박 시즌1의 제도적 결함과 부작용, 그로 인한 사각지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동안 권력의 눈치를 보며 정치권에 휘둘렸던 검찰 스스로가 개혁 대상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너무 극단적인 개혁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야권의 검수완박 시즌2 예고에 대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며 "검사가 수사를 하지 않고 기소 여부만 결정한다는 것을 추진한다는 것이 어떤 태풍을 몰고 오게 될 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모 판사는 《빨대사회》를 통해 "'제국의 패망이 가까워질수록 법은 더욱더 괴이한 모습을 띠기 마련'이라는 키케로의 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며 "누구도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 법률이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다면 제국의 패망을 앞당기고 있는 중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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