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 제안, 한덕수 헌법재판관 기습지명으로 올스톱… 시민사회, 광장의 개혁 추진은 계속
우원식 국회의장이 2025년 4월6일 오후 국회 사랑재에서 개헌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대통령 파면과 함께 닫힌 것은 광장이요, 열린 것은 조기 대선이었다. 2024년 12월3일 비상계엄 선포부터 2025년 4월4일 대통령 윤석열 파면까지 123일 동안 광장을 지켜온 시민들은 새 시대에 대한 소망을 쌓아둔 채 일상으로 돌아갔다. 파면 뒤 첫 주, 정치권에서는 연이은 출마 선언과 ‘개헌 제안’ 소동이 있었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기습 지명을 통해 내란 세력의 건재함도 목격됐다.
시민사회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기 대선판을 바라보고 있다. 계엄군을 가로막고, 대통령 윤석열의 체포와 탄핵을 외쳤던 광장에서 시민들은 정치 시스템과 사회의 작동원리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 ‘대개혁’ 의제들을 제기했다. 한겨레21이 입수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하 비상행동)의 사회 대개혁 과제 자료집은 수백 쪽에 이른다. 이들은 이러한 의제를 대선판에 밀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 뒤 처음 맞은 주말, 정치권에서 첫 ‘개혁’ 제안이 나왔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며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를 조기 대선과 같이 하자고 제안했다. 국민의힘은 우 의장의 제안을 환영하며 조기 대선의 중심축을 ‘개헌 논의’로 옮기고자 했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내란 종식이 먼저”라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결과적으로 우 의장은 3일 만에 제안을 철회했다.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 짚어보자. 윤석열이 탄핵당한 지 이틀 만인 2025년 4월6일, 우 의장이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개헌으로 대통령 권한을 분산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는 “대통령 선거일에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에 시행할 것을 제안한다. 기한 내에 합의할 수 있는 만큼 하되, 가장 어려운 권력구조 개편은 이번 기회에 꼭 하자는 것”이라고 취지를 밝혔다. 빠르게 추진할 계획도 제시했다. 60일 안에 국회 개헌특별위원회를 꾸려 개헌안을 확정하고, 대통령 투표 집단과 개헌안 투표 집단이 일치하도록 국민투표법도 고치자고 했다. 현행법에선 재외동포 등이 개헌안 투표를 할 수 없어 동시투표가 불가능하다.
속도전을 우려하는 취재진 질의에도 우 의장은 단호했다. “현재 국민투표법에 따라 개헌에 드는 시간이 적어도 38일인데, 이 부분도 여야가 합의하면 조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방향’을 묻는 말엔 ‘4년 중임제’를 콕 집어 “여야 정당들의 공감대가 넓은 상황으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사회 각계는 물론이고 각 정당에서도 개헌 추진에 적극 공감하는 소리가 높”고 “그간 많은 논의가 축적됐”다는 거다.
우 의장이 말한 ‘축적된 논의’란 선거 때마다 나온 대통령제 보완 논의를 일컫는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대법관·헌법재판관·국무총리 임면권을 모두 갖는다. 임기도 5년 단임제여서 탄핵 외엔 국민 여론을 반영할 수단이 없다시피 하다. 이런 대통령 승자독식 구조가 삼권분립을 흔들고 여야의 소모적인 정권 쟁탈전을 야기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있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려 급하게 개헌을 추진하면서 세밀한 손질까진 못한 탓이다. 이를 보완할 방안으로 국무총리 임면권을 국회로 넘기는 안(분권형 대통령제)이나 대통령 임기를 늘리되 ‘중간평가’를 하자는 안(4년 중임제) 등이 거론됐다. 2024년 11월 출범한 국회의장 직속 ‘국민 미래 개헌 자문위원회’(개헌자문위)도 최근까지 비슷한 안을 논의했고, 시민사회에서도 개헌안이 잇따라 나왔다.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내란죄 윤석열 퇴진! 국민주권 실현! 사회대개혁! 범국민촛불대행진\'\'에서 참석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우 의장의 개헌 논의는 시작부터 비판에 직면했다. 민주당에선 친이재명계를 중심으로 조기 대선의 중심이 내란 종식에서 개헌 논의로 넘어가버릴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국민의힘과 같은 테이블에서 중대사를 논의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 나왔다. 특히 개헌자문위에 내란을 옹호한 학자들이 참여한 것도 비판 대상이 됐다. 개헌자문위는 출범 이후 한동안 국민의힘 추천 위원 없이 운영됐는데, 2025년 3월17일 국민의힘 추천 위원들이 위촉됐다. 이 중엔 윤석열 탄핵심판 과정에서 “계엄선포는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하고 있는 권한”이란 주장을 펼친 이인호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포함됐다.
국민의힘은 환영했다. 권영세 비상대책위원장은 “개헌안을 마련해 대통령 선거일에 함께 국민투표에 부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고, 박민영 대변인은 “극단적 여소야대 국면 타개를 위한 대대적 개헌이 절실하다”고 발언했다. 때마침 홍준표 대구시장은 개헌 일정을 담은 책 ‘제7공화국 선진대국 시대를 연다’를 내놓고 대선 행보에 나섰다.
개헌자문위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개헌자문위 한 관계자는 “(국민의힘 추천 위원들이) 새로 들어왔기 때문에 기존에 작업했던 부분을 공유한 뒤에 조정하는 회의를 가져야 한다”며 “권력구조 개편 부분은 논란이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개헌자문위에선 국민의힘 추천 위원들이 위촉되기 전까지 분과별로 많은 논의가 이뤄져왔다. 합의된 부분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기후위기와 관련해 안정적인 기후에서 살 미래 세대의 권리를 새롭게 넣기로 한 부분이다.
다만 우 의장이 제시한 계획표엔 권력구조 개편은커녕 다른 분야에 대한 논의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헌법과 국민투표법에 따라 국회의 개헌안 발의는 최소 의결 20일 전까지, 국민투표 일자·투표안은 최소 투표 18일 전까지 공고해야 한다. 즉, 우 의장이 제시한 ‘38일 개헌’은 국회가 늦어도 4월26일까지 정당 간 합의를 거쳐 개헌안을 발의하고 3주 안에 국민 의견 수렴까지 마쳐 의결해야만 가능하다. 권력구조 개편이라는 첨예한 안건에 그런 속전속결 합의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애초에 무리한 스케줄이었다는 얘기다.
개헌이라는 사안의 중대성에 견줘 시민의 의견 수렴이 없다시피 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내란 이후 시민들이 합의한 것은 ‘하루빨리 내란 상태를 종식하고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민주헌정체제를 재건해야 한다’는 것까지”라며 “(그 이상) 개헌이 필요하다면 아직 각자의 안도 만들지 못한 정당들이 개헌특위를 먼저 꾸릴 것이 아니라 현행 헌법의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먼저 시민들에게 내놓고 설명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 맞는 순서”라고 지적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1987년 개헌 때는) 직선제라는 목표가 명확히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며 “비상행동이 100개가 넘는 사회 대개혁 과제를 가지고 있고 이런 것을 (정치권에서) 받아안아야 하는데 그런 것에 대한 논의 없이 권력구조 개편만 말하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2025년 3월9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성공회대 존데일리홀에서 200여 명의 시민이 모여 사회 대개혁 과제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비상행동 제공
한 교수의 이야기처럼 조기 대선 초반의 개헌 논의에는 광장의 시민들이 제기한 사회 대개혁 과제에 대한 폭넓은 수용의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단체들은 더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비상계엄 선포 뒤인 2024년 12월11일, 1700여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출범한 비상행동은 윤석열이 파면될 때까지 광장에 머물며 시민들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수집하고 분석했다. 온라인 시민공론장(천만의 연결)을 만들어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에 관한 제안도 받았다. 사회대개혁특별위원회(사회대개혁특위) 분야별 소위원회에서 때때로 사전대회를 열어 시민들과 함께 토론을 벌였고, 2025년 3월9일엔 시민 200여 명을 모아 대토론회를 열었다. 사회대개혁특위는 이런 숙의 과정을 거쳐 12개 분야에서 118개 개혁 과제를 선정했다. 개헌뿐 아니라 법률 개정이 필요하거나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총망라했다.
한겨레21이 확보한 사회 대개혁 과제 자료집(‘탄핵 너머, 대선 너머 사회대개혁으로 세상을 바꾸자!’)을 보면, 세부과제는 424개, 쪽수만 354쪽에 달한다. 자료집은 △다시 민주공화국 시민이 주인 되는 세상 △정의로운 경제와 민생이 안정된 사회 △평화·주권·역사정의가 실현되는 사회 △기후위기 너머 정의로운 생태사회 △모두의 행복한 삶을 위한 돌봄 중심 사회 △좋은 일자리와 보편적 노동권이 보장되는 사회 △생명·안전이 지켜지는 세상 △모두의 존엄과 공존을 위한 성평등·인권 사회 △언론·정보통신·문화의 공공성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 △식량주권과 먹거리가 보장되고 지역이 살아나는 세상 △교육과 청(소)년의 삶에 평등을 여는 세상 △내란 종식과 헌정질서 회복 등 12개 분야로 나눠 개혁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광장에서 직접 목소리를 냈던 이들도 사회대개혁특위에 들어가 개혁 과제를 선정하는 데 참여했다. 비상계엄 이후 지속적으로 농민의 구체적 어려움을 이야기해왔던 신지연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사무총장은 식량주권 관련 소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들어갔다. 충남 부여에서 토종 벼농사를 짓는 그는 농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방향의 개혁 과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농업 분야에선 국가가 책임지는 농정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거든요. 그런데 어떤 자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농민들이 직접 결정할 수 있는 구조가 보장돼야 해요. 그래서 이미 존재하는 상설기구인 농어업위(대통령 소속 농어업·농어촌특별위원회) 권한을 실질적으로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어요.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요.”
비상행동뿐만이 아니다. 정치권에서 윤석열이 파면된 이후 개헌, 그중에서도 4년 중임제와 같은 권력구조 개편에 관한 개혁 의제만 거론되는 사이 정치권 밖에선 다양한 의제들을 밀어 올리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기후운동 단위들에선 최소한 대선 국면에서 기후 의제가 주요하게 다뤄질 수 있게끔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후 관련) 정책 과제 등도 대선 후보나 정당에 요구하면서 시민 공론장 등도 진행할 계획이다.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기후 의제를 다루라는 (요구를 담은) 캠페인도 진행하고 있다.” 황인철 녹색연합 기후에너지팀장이 말했다.
공공운수노조도 4월8일 입장문을 통해 “국회의장과 거대 양당 주도의 개헌안에는 4년 중임제 등 권력구조 내용에만 주목하고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 없다”며 “광장의 시민들이 원하는 개헌을 시작할 때”라고 밝혔다. 공공운수노조는 헌법에서 규정한 최저임금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언급하며 “근로기준법상 근로자 여부와 상관없이 적정임금을 보장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남욱진 공공운수노조 정책부장은 “노동기본권 중 일할 권리와 노조 할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안전할 권리 등 다양한 의제를 대선 전후해 (각 정당에) 요구안 등의 형태로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미현 참여연대 정책기획국장은 “이제까지 그랬듯 개헌은 대통령 취임 이후론 뒷순위로 밀릴 확률이 높다. 적어도 ‘개헌하겠다’는 후보자의 약속이 공약에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2025년 버전 개헌 요구안’을 조만간 공개할 예정이다. 권력구조 개편과 사회 대개혁 요구를 두루 담았다. 시민 공론화 과정을 거쳐 2026년 6월 지방선거 때 함께 개헌 투표를 하는 일정을 요구할 방침이다.
2025년 3월9일 서울 구로구에 있는 성공회대 존데일리홀에서 시민 200여 명이 모여 사회 대개혁 과제에 관해 토론하고 있다. 비상행동 제공
관건은 실제 이런 개혁 과제들을 어떻게 정치권으로 밀어 올릴지다. 시민사회 단체들은 각 정당에 개혁 과제를 직접 요구해나가며 연대를 강조할 계획이다. 비상행동 사회대개혁특위는 윤석열 파면 이전부터 야 8당(민주당·조국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정의당·녹색당·노동당)과 계속 대화 채널을 가동해왔다. 윤순철 비상행동 사회대개혁특위 공동위원장은 “당장은 야 8당 전체를 초청해서 공동으로 정책토론회를 열고 의견을 받을 예정”이라며 “개별적으로 접촉도 하고 있는데, 정치권에선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고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비상행동은 각 정당의 공약이 나오면 광장에서 나온 사회 대개혁 의제들이 얼마나 반영됐는지도 점검할 계획이다. 윤석열 파면 이후 한국 사회는 이제 정당 시스템과 시민사회가 연합할 수 있을지 시험대에 섰다.
류석우 기자 raintin@hani.co.kr·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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