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가]
세 번째 장편 ‘로비’ 내놓은
배우 겸 영화감독 하정우
하정우가 만든 영화는 하정우와 심각하게 닮았다.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아무말 대잔치’처럼 툭툭 던지며 사람들을 웃기다가 이내 진지해진다. 그의 영화는 ‘이상하고 웃긴 미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어딘가 모자란 인물들이 끊임없이 입을 놀리며 부딪치는 촌극을 보고 있노라면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리는 자신의 모습에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다 중요한 메시지의 습격을 받는다.
세 번째 장편 ‘로비’를 내놓은 배우 겸 감독 하정우를 최근 서울 강남구 쇼박스 사옥에서 만났다. ‘감독 하정우’는 “연출하는 에너지는 기대감에서 나온다. 힘을 합쳐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란 순수한 기대감”이라며 “영화 현장은 혼자만의 자신감으로 끌고 갈 수 없다. 각자의 역할을 맡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부족함을 채워줄 거라고 신뢰하는 데서 오는 힘이 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로비’는 골프장을 배경으로 고위 공무원과 기업가, 기자, 프로 골퍼, 배우 등 다양한 인물들이 캐릭터 플레이를 펼치는 영화다. 스타트업 대표들이 국책 사업을 따내기 위해 골프 접대를 하는 상황에서 코미디가 팝콘처럼 튀어나온다. 하정우가 5년 전 골프를 시작하면서 쓰게 된 이야기다.
하정우는 “골프는 다른 세상 사람들의 스포츠라고만 여겼다. 처음 라운딩을 나가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됐다. 무엇보다 골프장에 온 사람들이 흥미롭게 보이기 시작했다”며 “골프 치러 온 사람들은 만나면 ‘요새 몸이 안 좋아서 잘 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인사를 나눈다. 이렇게 소위 ‘밑밥’을 깔고, 100원짜리 내기라고 해도 거기에 목숨을 건다. 처음엔 ‘왜 그럴까’ 했는데 나 자신도 그렇게 변하더라”고 돌이켰다.
그는 “골프를 망친 날은 세상을 잃은 느낌, 잘 친 날은 마치 골프를 터득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감정의 변화도 재밌었다”며 “평소엔 안 그러다가 골프채만 잡으면 극악무도하게 변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뭔가를 빌미로 골프장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 블랙코미디가 나올 것 같았다”고 말했다.
심각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 주제인 로비 골프를 하정우는 코미디 장르로 풀었다. 하지만 그의 코미디는 일부러 웃기려 한다기보단 무심한 표정과 의도 없는 말들이 빚어내는 우연의 결과물 같은 느낌을 준다. 하정우 본인을 비롯해 김의성, 강말금, 박병은, 박해수, 차주영, 최시원, 이동휘 등 각자의 특기대로 ‘한가락 하는’ 배우들이 말맛을 잘 살리기도 했다.
하정우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심각해봤자지, 진지해봤자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태도와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사람들은 일상에서 건조한 표정을 하고 따뜻하지 않은 말들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거기에 블랙코미디 요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다. 연출할 때도 배우들에게 절대 코미디를 의식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선보이는 작품을 처음 언론에 공개하는 날 그는 급성 충수돌기염으로 병원에 실려갔다. 업계에선 “하정우가 병까지 코미디로 소화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하정우는 “검사만 받고 행사장으로 가려 했는데 응급 수술 순번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3일 만에 방귀를 뀌고 나왔는데 의성이 형이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이번 영화는 어느 한 캐릭터도 평범하지 않고, 캐릭터성이 약한 인물이 강한 인물에 묻히지 않는다. 영화 포스터에는 보통 주인공 한두 명이 들어가지만 ‘로비’ 포스터에는 모든 등장 인물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감독 하정우의 세 번째 작품인 ‘로비’는 골프장을 배경으로 한다. 5년 전 골프를 시작하면서 알게 된 여러 이야기를 소재로 사용했다. 그는 “골프채만 잡으면 극악무도하게 변하는 인물들을 보면서 골프장에 모인 사람들 이야기를 쓰면 블랙코미디가 나올 것 같았다”고 말했다. 쇼박스 제공
하정우는 “사건의 절반 이상이 골프장에서 벌어진다.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배경의 단조로움을 상쇄하기 위해 많은 인물들을 채워넣기도 했다”며 “그러면서도 인물 하나하나가 그냥 흘러가지 않았으면 했다. 인생의 진리나 좋은 말은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라 우연히 만난 택시 기사의 입에서 나올 수도 있다.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인물들의 역할을 분담했다”고 설명했다.
캐릭터와 캐릭터가 만나 대사로 극을 진행시키는 하정우의 영화에선 연극의 느낌이 강하게 난다. 그는 “연극을 전공하고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시작한 영향이 있을 것”이라며 “영상미로 표현하기보다 대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내 영화의 특색이라면 특색”이라고 했다.
첫 연출작 ‘롤러코스터’(2013)는 하정우와 유머 코드가 맞는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나름의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로비’는 ‘롤러코스터’의 진화형으로도 해석된다. 그의 영화는 더 세련돼졌고, 캐스팅은 더욱 화려해졌다.
하정우는 “제작 과정이 더 쉬웠던 건 전혀 아니다. 두 번 프레젠테이션을 해서 투자를 받았다. 다만 이번엔 축이 되는 이야기가 중심에 더 탄탄하게 자리잡았으면 했다”며 “‘롤러코스터’는 마준규(정경호)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부각됐다면 ‘로비’는 더 넓은 범위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 한 인물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얽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상황들을 설정했다”고 밝혔다.
‘롤러코스터’ 이후 2년 만에 ‘허삼관’(2015)을 내놨지만 세 번째 작품 ‘로비’를 선보이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그동안 감독으로서 뭘 했는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하정우는 “‘허삼관’을 찍은 뒤 연출자로서의 정체성, 방향성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며 “개발한 시나리오들을 검토하면서 ‘내가 영화에 자꾸 비즈니스로 다가가는구나. 불순하다’고 느꼈다. 연출자에게 상업적 성공은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절대 손 놓고 있지 않았다”고 그는 강조했다. 하정우는 “파파라치 이야기, 하와이와 로스앤젤레스(LA)의 한인타운 이야기 등 여러 시나리오를 썼다”며 “그러다 ‘롤러코스터’ 때와 같은 마음으로 접근하고 만든 게 ‘로비’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우고 알아 온 세상을 사는 기준들이 있고, 그걸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그게 어긋났을 때의 불편함을 던졌다”고 했다.
그의 네 번째 연출작 ‘윗집 사람들’도 올 하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하정우는 “이 영화 역시 한정된 공간 안에서 캐릭터들이 치고 받는 이야기”라고 했다. 왜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에 끌릴까. 그는 “그럴 때 상황이 웃기게 흘러가지 않느냐”며 “특정 공간에 인물들을 가둬두면 묘한 긴장감이 생기고, 거기서 오는 인간들의 엇박자들을 기대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하정우는 ‘유머부심’을 가진 것으로 유명하다. 하정우는 자신에 대해 “보이는 것보다 더 웃긴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코미디가 아닌 다른 장르의 영화도 만들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액션 영화를 한번 찍어보고 싶다. ‘킹스맨’처럼 판타지 요소가 가미된, 양복 입은 사람들이 나오는 액션물을 만들 것”이라고 망설임 없이 예고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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