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 관계 끝장"…트럼프 "아무 문제 없어" 사건 축소에 급급
미국 고위 안보 관료들이 민간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실수로 기자를 초대한 것을 모른 채 당면한 군사 작전을 논의한 안보 사고에서 유럽은 또 한 번 충격을 맛봤다. 미국에 공유하는 정보 보안에 대한 신뢰가 깨진 데다 유럽을 "한심"한 "무임승차자"로 표현하는 대화 내용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 정부의 유럽에 대한 혐오감을 재확인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며 사건을 축소했다.
유럽의회 의원인 나탈리 루아조는 25일(이하 현지시간)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대화방 유출 사건을 두고 "푸틴(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제 실업자가 됐다"며 "미국이 스스로 정보를 누출해 더 이상 스파이 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꼬집었다. 그는 "미 정부엔 더 이상 어른이 없다. 10대 청소년도 이보다는 책임감 있을 것"이라며 푸틴 대통령이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무너뜨리려 할 필요도 없다. 트럼프(미 대통령)가 처리할 테니"라고 비꼬기도 했다.
미국과 정보를 공유하는 유럽 입장에선 미 안보 당국자들의 경각심 부족에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AP> 통신에 따르면 한 유럽 외교관은 이번 사건으로 동맹국들이 파트너로서 미국의 신뢰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사건이 안보에 대한 고의적 무시가 아니라 트럼프 정부의 경험 부족 탓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미국과 함께 파이브 아이즈(미국·영국·캐나다·뉴질랜드·호주의 군사·정보 동맹)에 속해 있는 영국의 경우 심각성을 더 크게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 자유민주당 대표 에드 데이비는 25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럼프의 백악관을 신뢰할 수 없다. 안보에 대한 그들의 무모한 접근은 영국 정보가 누출되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뜻"이라며 "정부는 미국과의 정보 공유 협정을 시급히 재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캐나다 CBC 방송을 보면 이날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도 미국 정보 유출이 "심각하고 심각한 문제"라며 이는 캐나다가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다만 유럽 정부들은 공식적 비판은 자제했다. <AP>는 영국 총리 대변인 데이브 페어스가 "미국은 안보, 국방, 정보 사안에서 우리와 매우 긴밀한 관계"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프랑스 외무부도 "미국은 우리의 동맹이며 프랑스는 특히 유럽 안보 분야를 포함한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 정부 및 유럽 파트너들과 계속해서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을 지낸 벤 호지스는 <뉴욕타임스>(NYT)에 정상적 보안 절차에 대한 무시는 "동맹국이 분석과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매우 꺼리게 만들 것"이라며 큰 변화가 없다는 이들이 "미국은 신뢰할 수 없다고 추정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 편집위원회는 사설에서 트럼프 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이 부른 이번 사건 탓에 "동맹국들이 향후 어떤 정보를 미 정부와 공유해야할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짚었다.
유럽을 "한심"한 "무임승차자"로 묘사한 유출된 대화 내용 또한 유럽에 깊은 상처를 안겼다. 홍해에서 상선을 공격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주요 무역로인 수에즈 운하를 막고 있는 예멘 후티 반군에 대한 미군 폭격을 논의한 해당 대화방에서 JD 밴스 미 부통령은 후티 공격이 미국이 아닌 유럽을 구하는 것이라고 불평했다.
그는 "미국 무역의 3%가 수에즈 운하를 통하는 반면 유럽은 48%가 이를 통한다"며 "유럽을 다시 구제하는 건 싫다"고 밝혔다. 밴스 부통령은 이러한 배경에서 후티 폭격이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유럽에 대한 메시지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통령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불만까지 시사했다.
이에 대화방에서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밴스 부통령에게 "유럽의 무임승차에 대한 당신의 혐오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며 유럽을 "한심하다"고 표현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공개된 자리가 아닌 비공개 메시지에서 나온 이러한 발언이 트럼프 정부의 유럽에 대한 강경한 입장이 단지 방위비나 무역 관련 "협상 전술"이 아니라 "뿌리 깊은 경멸"에 근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에 따르면 한 유럽연합(EU) 외교관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한 곳에서 저들이 유럽에 대해 말한 것을 보니 정신이 아찔해진다"고 토로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프랑스 분석가 프랑수아 하이스버그가 트럼프 정부의 유럽에 대한 태도가 단지 거래적이라면 유럽은 군사비 추가 지출로 비교적 쉽게 대응할 수 있지만 지난달 밴스 부통령이 독일 뮌헨안보회의(MSC) 연설에서 드러낸 혐오감은 그 이상의 의미라고 짚었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유럽이 "같은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밴스 부통령은 당시 연설에서 유럽 민주주의를 공격해 유럽 지도자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뉴욕타임스>를 보면 이탈리아 싱크탱크 국제관계연구소(IAI)의 나탈리 토치 국장은 이번 유출 내용을 통해 "대서양 관계가 끝났음이 분명해졌다. 기껏해야 무관심한 업신여김 뿐"이라며 "최악의 경우 유럽을 약화시키려는 적극적 시도"가 있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을 통해 이번 사건에서 보안 유출보다 트럼프 정부 관료들이 유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드러난 것이 더 "지속적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며 "(밴스) 부통령은 후티가 유럽을 괴롭히기 위해 선박 운항을 중단하도록 내버려 둘 의향이 있다는 건가"라고 반문했다. 신문은 이번 사건이 트럼프 정부가 "공통의 이익과 가치"에 기반한 관계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이는 위기 상황에서 미국의 많은 동맹들이 미국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이유"라고 지적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사설에서 밴스 부통령의 대화방에서의 발언은 "미국이 세계 경찰 역할을 간접적으로나마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길로 여겼던 시대가 분명히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25일 열린 미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서 이번 사건에 연루된 미 고위 정보 당국자들은 사건의 심각성을 축소했다. <AP>를 보면 해당 대화방에 참여한 존 랫클리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청문회에서 존 오소프 민주당 상원의원의 "이건 심각한 실수였다, 맞나?"는 질문을 받고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오소프 의원은 "사과도 없고 이 실수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도 없다"며 "완전히 비전문적"이고 "부끄러운 일"이라고 질책했다.
해당 대화방에 있었던 털시 개버드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과 랫클리프 국장 모두 청문회에서 대화방에서 나온 정보가 기밀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유출된 대화에서 헤그세스 장관은 해당 대화방에 지난 15일 후티 폭격에 관한 "무기, 목표물, 시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공유했고 이를 통해 실수로 그 대화방에 초대된 미 매체 <애틀랜틱>의 제프리 골드버그 편집장은 후티 공격 개시 2시간 전 이미 그 정보를 알고 있었다.
개버드 국장과 랫클리프 국장은 기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국방장관"의 일이라며 책임을 회피하기도 했다. 헤그세스 장관은 대화방에서 작전 세부 정보를 공유한 주체다.
민주당은 관련자들의 사임을 요구 중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하킴 제프리스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25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 역사상 가장 자격이 없는 국방장관"이라며 헤그세스 장관을 즉시 해임할 것을 촉구했다. 마크 워너 민주당 상원의원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헤그세스 장관과 마이클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25일 미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골드버그 편집장이 대화방에 실수로 초대된 것이 후티에 대한 군사 작전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며 이번 사건은 "지난 두 달간 (발생한) 유일한 작은 문제로, 심각한 문제는 아닌 걸로 판명됐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골드버그 편집장을 해당 대화방에 실수로 초대한 주체인 월츠 보좌관에 대해서도 "월츠는 교훈을 얻었고 좋은 사람"이라며 당장 책임을 물을 뜻이 없음을 시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 뉴스맥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유출된 대화가 "기밀이 아니었다"며 "아무 문제도 없었고 공격은 큰 성공을 거뒀다"고 주장했다.
▲ 25일(현지시간) 존 랫클리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오른쪽)과 털시 개버드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상원 정보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나란히 앉아 있다. ⓒAFP=연합뉴스
[김효진 기자(hjkim@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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