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美에 31兆 투자…한시름 놓은 韓 산업계
韓기업인 백악관 발표는 처음
대통령·하원의장과 공동발표
4兆 규모 미국산 LNG도 구매
멈춰있던 한미 경제협력 물꼬 터
투자 보따리에 표정 바뀐 트럼프
"많은 국가의 관세 유예할 수도"
NYT "현대차 덕에 韓관세 혜택"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압박에 한국은 속수무책이었다. 일본 유럽 등 주요국마다 정상이 ‘투자 보따리’를 내놓으며 트럼프 대통령을 달랬지만 리더십 공백에 빠진 한국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결정을 트럼프 대통령이 내리는 마당에 장관급 회담은 하나 마나였다.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큼지막한 선물을 건넨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에게 ‘한국에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풀어낸 민간 외교관’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유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현대차그룹의 투자 계획 발표로 한국이 적어도 다른 국가보다 낮은 관세를 부과받을 가능성이 생겼다”고 평가했다.
◇ 현대차, 미국 정부와 직접 접촉
미국 백악관에서 투자 계획 발표하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EPA연합뉴스
정 회장이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210억달러짜리 투자 계획을 발표할 때 그 옆자리에 선 건 트럼프 대통령과 연방 서열 3위인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이었다. 한국 기업인이 세계 정치·경제의 심장부인 백악관에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선 건 이번이 처음이다. 트럼프 정부 출범 후 이 자리에 선 해외 기업인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웨이저자 TSMC 회장 정도였다.
이번 투자 계획 발표는 현대차그룹이 직접 미국 정부와 접촉해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은 트럼프 정부 출범 전인 2023년 8월 해외 대관 조직인 ‘글로벌 폴리시 오피스’(GPO)를 꾸려 미국 정치권을 상대로 대외 활동을 벌여왔다.
현대차의 대규모 투자 계획은 자동차를 넘어 한국 산업계를 겨냥한 미국의 관세 압박을 완화하는 데도 힘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미국 투자 계획을 내놓지 않은 나라보다 우호적인 대우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요한 결정을 직접 내릴 뿐 아니라 즉흥적으로 결정할 때가 많다. 지난해 11월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의 회담을 거부한 그가 한 달 뒤 손 회장으로부터 1000억달러 투자 약속을 받은 직후 일본에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모든 관세가 다음달 2일에 발표되는 것은 아니다”며 “많은 국가의 관세를 유예할 수도 있다”고 했다. NYT도 “현대차의 대규모 투자 약속 덕분에 한국이 관세를 피하거나 다른 나라보다 낮은 관세율을 적용받을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관세 협상을 할 때는 ‘주고받을 것’을 논의하는데, 현대차의 투자 계획을 추후 협상 때 관세율 인하 카드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 트럼프 에너지 수출 정책도 지원사격
이번 투자 발표가 한·미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정 회장은 이날 30억달러(약 4조4000억원) 규모의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 구매 계획을 밝히며 “미국의 에너지산업을 지원하고 한국의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에너지 수출 확대 정책을 지원하겠다는 제스처다. 트럼프 대통령은 LNG 신규 수출 허가를 내주지 않던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조치를 취임 첫날 해제했다.
산업계에선 정 회장의 이런 행보를 현대차그룹에 뿌리내린 ‘사업보국’(事業報國·기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공헌한다) 철학에 따른 것으로 해석했다.
정 회장은 지난 6일 첨단차플랫폼본부(AVP) 임직원과의 타운홀 미팅에서 “자영업자가 돈을 많이 벌어야 경제가 살아나고 자동차도 더 팔린다. (자영업자를 돕게) 회식 많이 하시라”고 말하기도 했다.
양길성 기자 vertig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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