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현정의 더다이브 <34> | Interview 구본웅 스톡팜로드(SFR) 공동의장
한국 인공지능(AI) 업계에는 묘한 ‘열패감(劣敗感)’이 감돌고 있다. 2023년 11월, 오픈AI의 ‘챗GPT’ 등장 이후 AI 경쟁이 천문학적 자본 싸움으로 흘러가는 가운데, 중국의 딥시크 ‘RI’이나 모니카 ‘마누스 AI’처럼 강렬한 ‘한 방’을 아직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때 산업 정책을 정교하게 설계하던 엘리트 관료들의 존재감도 예전 같지 않다.
저돌적인 구상은 실리콘밸리에서 날아왔다. 실리콘밸리 투자사 퍼힐스(FIRHILLS)가 전라남도 해남 120만 평 부지에 3기가와트(GW) 이상의 AI 데이터센터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미국 오픈AI와 오라클,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이 추진하는 AI 인프라 사업에 빗대 ‘아시아판(版) 스타게이트(용어설명 참조)’라는 말이 나왔다.
퍼힐스와 그 모기업 스톡팜로드(SFR·Stock Farm Road)는 범(汎)LG가(家) 3세 구본웅 씨와 런던·요르단 기반의 투자사 BADR인베스트먼트를 설립한 아민 바르드 엘 딘(Amin Badr-El-Din)이 만든 신생 벤처 투자사다.
구본웅 스톡팜로드 공동의장/류현정 기자
기자는 지난 3월 초 서울에서 구본웅 SFR 공동의장을 만나 AI 데이터센터 사업 계획을 들었다. 구 의장은 인터뷰에서 “한국은 모바일 시대에 뒤처졌으나, 삼성전자의 갤럭시 스마트폰으로 반전을 이뤄냈다. 그러나 AI 시대에도 같은 방식으로 따라잡을 수 있다고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이 LLM(대규모 언어 모델) 경쟁에서 선두에 서기 어렵다면, 초거대 데이터센터의 테스트베드(신기술 시험 무대)로서 거듭나, AI 시대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남은 지난 2월 26일(현지 시간) 미국 산타클라라 하얏트 호텔에서 투자사 퍼힐스(FIR HILLS), 서남해안기업도시개발, 해남군과 함께 ‘솔라시도 AI 슈퍼클러스터 허브’ 구축을 위한 양해각서(MOA)를 체결했다.
다음은 구 공동의장과 일문일답.
― 3GW급 데이터센터 건립은 초대형 프로젝트다. 3GW는 약 225만~300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과 맞먹는다. 미국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의 각 데이터센터도 1GW 급(총 5GW)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추진 중인 AI 슈퍼클러스터의 규모는 한국 기업 수요뿐만 아니라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려는 글로벌 빅 테크 수요까지 반영한 것이다. 향후 AGI(범용 인공지능) 학습과 추론 수요도 염두에 뒀다.
AI 슈퍼클러스터는 아시아의 AI 허브 역할을 하며, 각국의 소규모 AI 추론 인프라와 연계되는 방식으로 운영될 것이다. 이는 글로벌 대형 클라우드 기업들이 각국에 리전(Region)과 에지(Edge) 인프라를 분산 구축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과 유사하다.
이와 관련해 필리핀 내 주요 기업과 AI 추론 인프라 구축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도 유사한 협력을 추진 중이다. 퍼힐스는 이같은 확장 전략을 통해 아시아 전역의 AI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YONHAP PHOTO-3187> 해남 솔라시도에 AI슈퍼클러스터 구축 (무안=연합뉴스) 미국을 순방 중인 김영록 전남도지사(왼쪽 두번째)가 26일(현지 시간) 샌프란시스코 하얏트 호텔에서 퍼힐스(FIR HILLS), 서남해안기업도시개발(주), 해남군과 함께 '솔라시도 AI 슈퍼클러스터 구축' 업무협약을 하고 있다.[전남도 제공.재판매 및 DB금지] 2025.2.27 minu21@yna.co.kr/2025-02-27 11:05:48/<저작권자 ⓒ 1980-2025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글로벌 빅 테크 기업들이 한국에 위치한 AI 데이터센터에 입주하거나 투자할까.
“미국에서 데이터센터 건립 관계자들을 여럿 만났다. 한국에서는 ‘전력이 있다’고 하면 한국전력이 95% 이상 공급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의지’가 있다는 수준이다. 미국에서 데이터센터를 건립하려면, 부지 조성과 건축에 8년 이상 걸린다.
AI 전쟁에서 승부처는 ‘속도’다. 1~2년 빨리 AI 인프라를 확보하는 것이 글로벌 빅 테크 기업들에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3년 내 초거대 AI 데이터센터를 만들겠다는 계획이고 한국이 그 전략적 요충지라고 투자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한국이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에도 지침이 되는 AI 데이터센터의 ‘테스트베드’가 된다면, 한·미 협력 사업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에 대해 김영록 전남도지사는 “알파벳(구글 모회사),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빅 테크 기업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투자 유치에 나서 AI 대전환 시대에 대한민국이 글로벌 AI 시장에서 도약하는 데 기여하겠다”고 밝혔다.
김 지사는 또 산업부와 정치권을 잇따라 만나 메가 샌드박스 개념의 AI 에너지 특구를 제안했다. 솔라시도 AI 슈퍼클러스터 허브 구축을 위해 기존의 규제 개혁보다 훨씬 폭넓게 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래픽=손민균
― 전남의 노력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 지방 정부에서 이정도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는 데 한계와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직접 챙기고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도 자국 내 AI 및 데이터센터 인프라 구축에 필요한 자금( 1090억 유로) 유치에 나서고 있다.
“AI 데이터센터는 전력·통신·용수·컴퓨팅에 관한 기술과 인력이 망라된 복합체이다. 국가의 정책적 리더십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가령, 한국의 데이터센터 전력 요금은 일반 가정용 전력 요금 체계로 돼 있다. 데이터센터 전용 요금제를 만들거나 산업용 전기와 마찬가지로 전력회사와 사업자의 양자 장기계약을 통해 요금을 낮춰야 국제 경쟁력이 갖출 수 있다.
최근 소프트뱅크는 ‘일본을 AI 인프라 리더 국가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AI 인프라가 곧 국가 경쟁력임을 강조한 것이다.”
― 데이터센터 건립과 운용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 조달 계획은.
“현재 퍼힐스가 예상하는 초기 투자액은 100억 달러(약 15조 원) 수준이며, 향후 한국 전체로 최대 350억 달러(약 50조 원)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AI용 데이터센터 수요가 폭발하고 있어 자금 조달이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리콘밸리와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투자 유치를 진행 중이며, 다수의 투자자들과 협의하고 있다. 특히 글로벌 기술 기업들과 협력해 공동 투자 및 기술적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전남의 행정적·재정적 지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남도와의 계약을 위해 곧 퍼힐스코리아도 설립할 예정이다. ”
― 인터넷 시대의 선도 국가였고 모바일 시대의 스마트폰 강자였던 한국이 AI 시대에는 좀처럼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이 LLM 분야 선두를 차지하는 게 쉽지 않다면, 초대형 AI 인프라의 테스트베드 기지로 거듭나자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 AI 인프라를 바탕으로 한국의 강점을 조합하면, 제조업 AI (Industrial AI), 창작 AI (Creative AI), 상거래 AI (Commerce AI) 등 각 분야 우수한 AI 애플리케이션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 20년 넘게 미국에서 비즈니스를 했다. 미국식 협상, 좀더 구체적으로 트럼프식 협상에 대한 전략에 대해 조언하자면.
“트럼프식 협상의 특징은 강한 압박과 선제적 주장이다. 트럼프는 처음부터 강한 요구를 던지고 협상 상대를 흔드는 방식을 자주 사용한다. 실리콘밸리의 비즈니스 협상 자리에서도 비슷한 상황을 많이 겪었다.
심리적으로 끌려가거나 상대방에게 아부한다고 해서 실질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다. 단순한 반박도 안된다. 저자세나 방어적 태도도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비즈니스가 왜 매력적인지, 한국이 왜 중요한지를 강하게 어필해야 한다. 일본 총리도 트럼프와의 성공적인 정상 회담을 가졌다고 자평했는데, 결과적으로 일본 철강 제품에 대한 관세를 피하지 못하지 않았나.”
2월 27일(현지 시간)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 존 헤네시 의장(왼쪽 가운데)과 구본웅(맨 왼쪽)·아민 바르드 엘 딘 스톡팜로드(SFR) 공동의장이 미국 캘리포니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김영록 전라남도 지사(맨 오른쪽)를 만나 AI 데이터센터 협력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뉴시스, 전남도 제공
구글의 모기업인 알파벳 존 헤네시 의장(가운데)과 구본웅(왼쪽)·아민 바르드 엘 딘 스톡팜로드(SFR) 공동의장이 미국 캘리’포니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전남 AI 클러스터 추진단을 만나 협력방안에 대해세 논의하고 있다. /퍼힐스 제공
― 한국 재벌가에서 태어나 스스로 그 틀을 벗어난 ‘풍운아(風雲兒)’로 평가 받는다.
“처음에는 실리콘밸리에서 대학 4년만 보내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20년 넘게 이곳에 머무를 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제 숙명(宿命)이라고 생각한다. 나한테 주어진 ‘미션(mission)’이 있을 거라고.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벤처 투자할 때는 ‘사업’과 ‘혁신 아이디어’ 그 자체에만 집중했다. 이제는 제도와 네트워크까지 고려하고,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를 아랍에미리트(UAE) 경제 다각화와 금융 인프라 구축을 이끈 아민 바드르 엘딘(Amin Badr-El-Din) SFR 공동의장과 함께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아민은 중동 국가와 다른 국가의 협업 프로젝트도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이다."
― 한국에서 실리콘밸리처럼 ‘빅 아이디어(big idea)’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한국의 뛰어난 인재들이 맘껏 뜻을 펼칠 ‘놀이판’이 부족한 게 아닐까. 도전해보기도 전에 결과를 예측하고 평가하는 문화가 새롭고 큰 구상을 가로막는다.
혁신은 ‘홈런’이 필요한 게임이다. ‘단타’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빅 스윙(Big Swing)’을 해야 한다. 어쩌면, 실패는 불가피한 과정이다. 실패를 통해서 ‘빅 스윙’이 견고해지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강점은 실패를 성장의 과정으로 인정하고, 그 경험을 높게 평가하는 문화에 있다. 나도 그 덕분에 존 헤네시(John Hennessy) 전 스탠퍼드 총장(현 알파벳 의장)과 같은 인물을 SFR의 고문으로 모실 수 있었다. 유럽연합(EU)의 집행위원이자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한 닐리 크로스(Neelie Kroes) 같은 경제정잭 전문가도 SFR 자문역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단순히 이름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경영 전략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하고 글로벌 핵심 인사와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SFR에서는 그들을 ‘브레인 트러스트(brain trust)’라고 부른다.”
AI 시대에 데이터센터의 중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초거대 데이터센터는 곧 ‘초거대 AI’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실리콘밸리에서 시작된 대담한 기획이 한국 특유의 ‘야성(野性)’을 깨울 수 있을까. 한국은 세계 최초 64메가 D램 개발, 세계 7번째 TDX(전전자교환기) 국산화, 세계 최초 CDMA 상용화 등의 타이틀을 보유한 나라다.
그래픽=정서희
용어설명
스타게이트(Stargate)
미국 오픈AI와 일본 소프트뱅크 그룹, 미국 오라클이 주도하는 인공지능(AI) 합작 벤처회사 프로젝트. 미국 내 데이터센터 등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향후 4년간 최대 5000억 달러(약 700조 원)가 투입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 프로젝트를 직접 발표해 눈길을 끌었다. 블룸버그는 오픈AI와 오라클이 텍사스주 애빌린에 스타게이트 첫 번째 데이터센터를 건설 중이며, 2026년까지 엔비디아의 최신 AI 칩인 GB200을 6만4000개 장착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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