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다역으로 꾸민 연극 같은 70분
명실상부 최고의 팝스타 입증한 무대
고가 티켓 대비 짧은 공연 아쉬움 속출
제니의 ‘더 루비 익스피리언스’(The Ruby Experience) 쇼 [OA엔터테인먼트 제공]
[헤럴드경제(인천)=고승희 기자] 백색의 부엉이가 영상에서 날아오르면 제니는 ‘21세기의 제사장’이 된다. 가까운 미래의 어느 행성을 지배하는 최고 존엄. 블랙의 선글래스에 직각의 어깨 라인으로 떨어지는 긴 코트, SF영화 속 주인공 같은 그가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위엄을 보태 말을 잇는다.
“‘머리를 숙여라’ 내가 명하니, ‘내가 곧 에너지’ 그 자체, 나는 네가 상상할 수 없는 존재.” (‘젠’ 가사 중)
그룹 블랙핑크의 제니가 마침내 데뷔 이후 첫 솔로 콘서트로 팬들과 만났다. 지난 15일 인천 영종도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더 루비 익스피리언스’(The Ruby Experience) 쇼다.
한 땀 한 땀 공들여 작업해 지난해부터 맛보기처럼 공개했고, ‘맛보기’ 만이 아니었던 성취들을 만들어간 첫 솔로 정규 1집 ‘루비’(Ruby)의 수록곡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제니는 앞서 6∼7일(이하 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10일 뉴욕에서 공연했고, 이날 인천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마지막 무대를 꾸몄다. 첫 솔로 콘서트에도 제니는 약 1만석의 인스파이어 아레나를 혼자 힘으로 꽉 채웠다.
제니의 귀환에 공연장으로 향하는 길은 해외팬들이 북적였고, 팬들이 준비한 현수막이 이날의 콘서트 열기를 미리 전했다. 콘서트엔 블랙핑크 로제를 비롯해 유재석, 뉴진스, 배우 김지원 이동휘, 빅뱅 대성, 지코, 피오, 그레이, 위너 이승훈 등 스타들도 찾았다. 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스타들의 행렬에 공연은 10분 가량 지연되며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루비’라는 연극 속 1인 다역 제니…“버벅대고 바보같은 모습 담아”
공연에선 앨범이 발아된 콘셉트를 고스란히 옮겼다. 제니의 앨범 ‘루비’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에서 아이디어가 싹 텄다. ‘온 세상은 하나의 무대일 뿐이고, 모든 사람은 단지 연극을 할 뿐이다(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merely players)‘라는 구절이다. 그러니 70분간 이어진 무대는 솔로 가수 제니의 콘서트이면서, 1인 다역을 하는 제니의 연극이기도 했다. 제니는 이날 “앨범을 준비하는 동안 많은 배움이 있었다. 화려하게 모든 걸 다해내는 모습 말고, 조금은 버벅대고 바보 같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았다”고도 했다.
제니는 이번 무대를 위해 공들여 준비한 앨범 수록곡 15개의 모든 안무와 콘셉트를 정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블랙핑크 시절의 솔로곡과 게스트 무대를 넣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굳이 돌아가지 않고 ‘현재’와 정면승부했다. ‘홀로서기’로 세상에 나온 자신을 온전히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담긴 무대였다.
마침내 막이 오르자 제니는 FKJ와 함께 작업한 1분 15초 분량의 인트로로 공연의 출발을 알렸다. 발레리나의 무대로 시작한 무대는 세 번째 수록곡인 ‘스타트 어 워’(start a war)로 본격적인 ‘쇼’를 시작했다.
제니의 ‘더 루비 익스피리언스’(The Ruby Experience) 쇼 [OA엔터테인먼트 제공]
제니 스스로는 “솔로 콘서트는 처음이라 버벅대도 이해해달라”고 했지만 그의 무대는 아티스트로도 팬들과 소통하는 스타로도 온전했다. 제니의 무대는 매순간 아이콘이 된 그의 탁월한 감각과 자유분방함, 무한히 발산되는 뛰어난 재능의 향연이었다. 블랙핑크 시절 보여줘야 했던 칼군무에서 벗어나 자연스럽게 무대를 즐기는 팝스타 제니의 면모를 마주할 수 있었다.
15곡의 무대는 각기 다른 콘셉트로 보는 재미를 더했다. 노랫말과 뮤직비디오를 충분히 숙지한 팬이라면 각각의 콘셉트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스토리텔링이 잘 된 무대였다. 설사 그의 히스토리를 모른다 할지라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무대를 만날 수 있었다.
제니는 각각의 노래마다 전혀 다른 배역을 맡아 자기 안의 다양한 색을 끌어냈다. 사랑에 빠진 20대 여성, 새로운 길을 여는 선지자,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억측과 오해 속에 전 스타, 그리고 인간 김제니의 모습까지, 때론 도발과 관능을 오가고, 때론 위엄과 존엄을 보여주며, 때론 연약한 속내를 드러내며 온전히 자신을 꺼내보였다. 이미 앨범에서 제니는 이미 매곡마다 전혀 다른 음색을 통해 보컬리스트로의 다양성을 보여줬다.
사랑에 빠진 강렬한 감정을 무대 위에 누운 채 선보인 ‘핸들바스’(Handlebars)에 이어 모든 여성들의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삶을 응원하는 ‘만트라’(Mantra)가 등장하자 소녀팬들의 함성도 거세졌다. “너의 편이 되주겠다”는 제니의 노래에 ‘제니’의 이름이 터져나왔고, 그 때마다 제니는 관객을 향해 팝스타다운 미소로 화답했다.
여성과의 연대를 이어가듯 여성 댄서들로만 무대를 꾸민 ‘댐 라이트’(Damn Right)에선 붉은 조명 아래 도발적인 매력을 만날 수 있었고, ‘서울 시티’(Seoul City)에선 이날 공연을 통해 처음으로 뮤직비디오까지 공개됐다. ‘서울에 대한 러브송’을 담은 이 곡에선 한국에서 태어나 뉴질랜드에서 자랐고, 전 세계에서 투어 여행을 하며 상당 시간을 보내는 제니 안의 디아스포라를 만나게 된다. 그는 서울을 “많은 도시 중 가장 소중한 곳”으로 표현했다.
제니의 ‘더 루비 익스피리언스’(The Ruby Experience) 쇼 [OA엔터테인먼트 제공]
귀에 확 꽂히는 제니식 ‘아재개그’ 노랫말인 ‘잘난게 죄니’가 담긴 앨범의 타이틀곡 ‘라이크 제니’(like JENNIE) 무대는 단연 최고의 함성이 쏟아졌다. 빨리감기한 패션쇼처럼 댄서 한 사람씩 무대로 등장해 무대를 이어갔고, 마침내 제니가 쏟아내는 래핑에 다다르면 짜릿한 도파민이 터져나왔다. 이 무대에선 라이브 카메라가 무대에 올라와 음악방송처럼 제니와 댄서들의 모습을 대형 화면으로 담아냈다. 팝가수 제니퍼 로페즈의 ‘프롬 더 블록’을 샘플링한 ’위드 더 아이이‘(with the IE)에선 90년대 감성과 올드스쿨 사운드를 온전히 구현했다. 올드카가 배경으로 등장한 것도 볼거리 중 하나였다.
11곡 달리기 후 눈물의 인사
제니의 목소리를 듣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번 앨범을 온전히 들려주고, 보여주고 싶었던 제니의 의도가 묻어난 대목이었다. 인트로부터 시작해 무려 11곡을 모두 부른 뒤에야 제니는 팬들과 첫 인사를 나눴다.
그는 끊김없이 이어온 무대의 여운을 가라앉히듯 숨을 몰아쉬며 “저의 첫 단독 콘서트에 와주신 여러분께 너무 감사하다”며 “막상 여기에 올라오니 되게 부끄럽다”는 말로 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팬들과 마주한 그는 연극 무대 위의 배우도, 화려한 조명 아래 팝스타도 아닌 김제니로 돌아왔다. 제니는 ”아직도 꿈만 같고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이 자리에서 이렇게 여러분과 얼굴을 보고, 인사 하고, 이야기하니 이제야 (실감이) 온다”며 “괜찮으시다면 저를 위해 다같이 소리 한 번 질러주실 수 있나요?”라고 말했다. 콘서트 단골 멘트인 ‘소리 질러’ 대신 청유형 문장을 쓴 것도 인상적이었다.
제니의 이야기에 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 낼 수 있는 최대치의 함성을 쏟아냈다. 진심 어린 응원과 애정이 담긴 함성에 제니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는 “앨범을 내고서 너무 큰 사랑을 받고, 무한한 사랑을 받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며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모드를 바꿔끼워 이어지는 후반부도 제니는 더 뜨겁게 달렸다. 퍼 코트를 입고 빨간 마이크를 든 채 ‘F.T.S’를, 밴드 세션에 맞춰 ‘필터’를 선보였다. ‘필터 없이 온전한 나로 살아가자’는 이 곡에서 제니는 단단한 고음까지 안정적으로 소화하며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쉴 틈 없이 이어진 무대 뒤의 마무리는 ‘스타라이트’(Starlight)와 ‘트윈’(twin)이었다. 대중이 보는 제니와 그 이면의 김제니의 모습을 담은 ‘스타라이트’와 운명처럼 연결된 관계를 노래한 ‘트윈’은 화려한 무대의 에필로그로 안성맞춤이었다.
제니의 ‘더 루비 익스피리언스’(The Ruby Experience) 쇼 [OA엔터테인먼트 제공]
제니의, 제니에 의한 무대…티켓 가격 대비 짧은 공연 아쉬움 속출
이번 공연은 온전히 ‘제니의, 제니에 의한’ 무대였다. 압도적 무대 연출 없이 제니만의 목소리, 그만의 퍼포먼스로 꽉 채웠다.
인스파이어 아레나는 가수들의 콘서트 무대에 최적화된 사운드로 정평이 난 곳이나 이날 제니의 콘서트에선 보컬과 악기 밸런스가 균일하지 않았고, 간혹 제니가 노래를 할 땐 마이크 음량이 지나치게 커져 잡음이 섞이기도 했다. 공연에 대한 뒷말도 나왔다. 기존 K-팝 가수들의 공연과 달리 70분 만에 끝나버린 짧은 공연은 비싼 티켓 가격 대비 팬들의 아쉬움을 샀다. 루비석 22만원, R석 16만 5000원, S석 15만 4000원, A석 14만 3000원으로 티켓 가격이 책정됐다. 현재 대중음악 공연은 무대 구성과 세트리스트 등에 따라 공연기획사에서 자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70~90분 가량의 공연 시간은 팝스타애갠 일반적이나 소위 ‘앵앵콜’(앙코르 후 또 앙코르)까지 이어지는 3~4시간 짜리 K-팝 콘서트에 익숙한 팬들에겐 불만이 나올 법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덮는 것은 제니의 음악과 말이었다. 제니의 이야기엔 그의 노래만큼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아무리 식상해도 그 이유를 표현할 언어는 ‘진정성’ 이외엔 없다. 저 멀리 빛나는 슈퍼스타가 아닌 팬들 앞에서만큼은 같은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제니로서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전한다. 블랙핑크 시절부터 팬들 앞에만 서면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던 마음의 실체는 이날 마주하게 됐다.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언제나 좋은 음악을 하고, 좋은 사람인 제니가 될게요. 계속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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