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JTBC 협상의>
[김종성 기자]
노동조합에 가입한 노동자가 3백만에 다가서고 있다. 작년 12월 18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23년 전국 노동조합 조직 현황'에 따르면, 재작년의 노조 가입자는 273만 7천 명이다. 116만은 한국노총에, 108만 6천은 민주노총에, 근 50만에 달하는 나머지는 기타 조합에 속해 있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 같은 연합단체는 노동자 조직인 동시에 사실상의 정치세력이다. 근 3백 만에 가까운 조합원과 그 가족까지 감안하면, 노동자 조직은 가장 강력하고 튼튼한 정치조직 혹은 정치조직 배후세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내는 정치세력이 미미하다. 재벌 대기업의 목소리는 국민의힘 관계자들의 발언이나 언론 사설을 통해 하루에도 수없이 울려퍼지지만, 노동자의 목소리가 주요 정당 관계자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일은 별로 없다.
통계청 사회통계국의 지난 1월 15일 발표에 따르면, 작년 12월의 전체 취업자는 2804만 1천 명이다. 이들의 가족까지 감안하면, 국민의 절대다수가 노동자로 생활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의 목소리는 법률과 제도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할 뿐 아니라, 이따금 반영된다 해도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에 막혀 힘을 잃을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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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TBC 새 주말극 '협상의 기술' 포스터 |
ⓒ JTBC |
명징하게 드러난 계급의식
배우 이제훈이 주연인 JTBC 기업 드라마 <협상의 기술>에 능글능글한 직원 하나가 등장한다. 자기 직장인 산인그룹 내의 모든 생리를 다 아는 것 같은 인사팀 대리 임형섭(이규성 분)이다. 8일 방영된 제1회 중간쯤에서 그는 대학 후배인 인턴 최진수(차강윤 분)에게 처세술을 알려주겠다며 상무실과 전무실이 있는 회사 18층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거기서 그는 "야, 여기가 제일 높은 데야"라고 일러준다. 최진수가 "위층도 있잖아요"라고 하자, "거긴 회장실이잖아, 어?"라며 "민간인한텐 여기가 제일 높은 데지"라고 선을 긋는다.
이보다 앞서 나온 장면에서 그는 드라마 주제인 기업 인수·합병(M&A)의 본질을 최진수에게 강의한다. M&A의 본질은 죽이고 살리는 것이라며, 기업을 죽이고 살리는 게 아니라 직원들을 죽이고 살리는 거라고 열변을 토한다. 그는 노동자와 기업주 사이의 경계나 노동자의 열악한 처지를 능글능글한 화법으로 시청자에게 전달한다.
제한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두 직원의 대화에서는 노동자의 계급의식이 나타난다. 불합리한 현 제도 하에서 노동자가 자기 몫을 챙기려면 적극적 투쟁이 필요하다는 수준의 적극적 계급의식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두 계급이 각각 별개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노동자의 처지가 매우 열악하다는 인식은 드러난다.
직선제 개헌 투쟁인 1987년 6월항쟁의 결실에 가장 먼저 손을 댄 집단은 노동자 조직이다. 전두환 정권이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수용 의사를 밝힌 뒤부터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노동환경이 일정 정도 개선됐다.
사회 전반의 민주화 추세와 더불어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그런 현상을 보고 노태우 정권(1988~1993)은 무력혁명이라도 벌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품었다. 1989년 9월 4일자 <경향신문> 기사 '개혁이 없으면 혁명이 일어난다'는 조순 부총리나 문희갑 경제수석비서관 같은 경제라인 내부에 그 같은 우려가 존재했다고 알려준다. 노 정권이 한편으로는 토지공개념 추진을 내세우고 한편으로는 공안정국을 강행한 데는 그런 두려움도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훨씬 넘은 지금까지도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는 만족할 만한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한국 노동자 상당수는 <협상의 기술>에서 임형섭이 말한 '죽이고 살리는 것'을 경험했지만, 이들의 정치적 단결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2003년 6월과 7월에 실시된 '사회구조의 변화와 일자리' 조사에 기초한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의 논문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경험과 노동계급 계급의식'(2008년 <경제와 사회> 가을호)은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의 이해관계 적대성을 경험해 계급적 적대의식이 높아짐으로써 구조조정 사업장 노동자가 높은 계급의식을 보인다"라는 실증적 결과가 도출됐다고 설명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6월항쟁의 승자 중 하나인 노동자 조직이 IMF 이후의 대대적 구조조정을 거치고도 이렇다 할 정치적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신자유주의의 부흥과 위기
민주노동당이 2004년 총선에서 10석을 얻어 제3위 정당이 된 일이 있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의 정치의식과 단결력이 상승한 결과라기보다는 윌리엄 페리 미국 대북조정관이 주도한 1999년 페리 프로세스와 김대중·김정일이 나선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 등으로 인한 북미 및 남북 해빙에 따른 결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6월항쟁을 계기로 노동자 조직이 강해지는 듯하다가 더 이상 동력을 내지 못한 데에는 아무래도 신자유주의 세계질서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과 서방세계의 재벌 자본가들은 68혁명, 베트남전쟁 반전운동,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등이 힘을 발휘한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다소 움츠리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이 힘을 추스르며 세계 지배력을 강화한 것은 로널드 레이건 미국 행정부와 마거릿 대처 영국 내각이 세계를 주도했던 1980년대 초반이다.
이 시기부터 맹위를 떨친 신자유주의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전 세계 질서를 미국과 서방 자본가들의 입맛에 맞게 재편했다. 이 시기에 한국 등에서는 세계화가 지고지상의 이념으로 선전되는 속에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비정규직 고용 등이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1990년을 전후한 시점에 미·소 냉전이 와해되는 세계적 탈냉전이 있었다. 이는 냉전에 기반한 국가권력들을 약화시키고 세계 대중을 강화시켰다. 이로 인해 대중의 파워가 강해진 것은 사실이나, 탈냉전에 편승해 한층 더 강해진 쪽은 미국과 서방의 대자본가들이다. 이들은 약화된 국가권력을 상대로 한층 강한 영향력을 발휘해 세계 주요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시기에 한국 노동자 조직들이 전두환 독재에서 벗어나 노동자 대투쟁을 벌여 나갔다. 이 같은 시기적 우연은 한국 노동자 조직의 투쟁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이념의 훼방을 받는 환경적 요인이 됐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에도 당연히 지장이 됐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는 일대 타격을 입었다. 2010년에 중국이 세계 경제 2위로 올라서면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중국 견제에 주력하게 된 데는 이런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그런 상태에서 2019년의 코로나 팬데믹에 이어 2025년의 도널드 트럼프 재집권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한층 더 악재가 되고 있다.
한국 노동자 조직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최대 장애물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였다. 그 세계화의 기반이 지금 트럼프의 '난도질'로 한층 더 파괴되고 있다. 이론적으로 본다면, 근 300만의 조직력을 갖춘 한국 노동자 조직이 정치적 활로를 모색하기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셈이다. 임형섭과 최진수가 18층뿐 아니라 19층에도 자유롭게 올라가볼 수 있는 환경이 점차 생겨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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